여름 바다
경상남도, 남해

피서의 절정이라는 극성수기였다. 체감온도가 40도를 넘었지만 누진세다 뭐다 해서 맘 놓고 에어컨을 틀어대지도 못했다. 그래서 모두가 쫓기듯 집을 떠났나보다. 막상 떠나려고 보니 숙소를 정하는 데부터 어려움이 있었다. 괜찮아 보이는 곳은 평상시 가격의 두 배 이상, 쉽게 결정하기엔 곤란한 가격이었지만 그나마도 있는 게 다행. 수화기 너머로 빈방이 없다는 대답이 부지기수였다. 

다른 때였다면 준비 없이, 계획 없이 그냥 훌쩍 떠나기도 했겠지만 이것도 날씨 탓이었을까? 자신이 없다. 여기저기 수소문하다 기적적으로 숙소를 예약하고 나서야 달리기 시작해 남해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은모래비치 해수욕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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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은모래해변
모래가 유난히 곱고 하얗다고 해서 ‘은모래해변’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곳에 도착한 것은 한 낮. 모래사장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나는 듯 아찔한 더위였다. 맨발로는 모래 위를 걸을 수도 없을 정도. 신발에 들어가는 뜨거운 모래와 바글바글한 사람들은 내가 생각했던 해변의 그림과는 분명 거리가 있었다. 자연스레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맥주가 담긴 검정 비닐봉지를 손목에 걸고 멍하니 서서 그냥 숙소로 들어갈까, 다른 곳으로 가볼까 망설이고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건다. 

한 두마디 대답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파라솔 값을 지불하고 돗자리에 앉아 모래를 털어내고 있다. 그리고 바다를 관찰했다. 할머니들 한 무리가 양산을 쓴 채로 엉덩이를 물에 담그고 파도가 칠 때마다 소녀들처럼 웃는다.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는 아이, 기세 좋게 수영해 들어가는 소년. 파도가 올 때마다 점프하는 소녀,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사람, 그리고 정신없이 물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들…. 

모래성에 뭍어 온 골뱅이 한 접시 
해수욕을 즐겼던 게 언제였지? 좀 크고 나서는 바닷물에 들어간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혹시 몰라 챙겨온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작은 게들이 부지런히 만들어 놓은 수많은 모래사탕을 발바닥으로 밟아 으깨며 바다로 들어간다. 기분 좋게 시원한 물의 온도. 한참을 걸어가도 가슴도 안 오는 마음 편한 수심이다. 튜브에 몸을 기대 턱을 괴고 수평선 쪽을 보면 눈앞에는 바다, 섬, 하늘, 그리고 그 사이에 파도 말고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건 분명 본 적이 있는 그림 인 게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거슬러 온 것만 같다. 

병아리 같던 동생들과 나를 튜브에 끼워서 튜브 줄을 하나로 모아 잡고 씩씩하게 물속으로 걸어들어가던 젊은 날의 아빠, 파도가 올 때 마다 웃음소리도 커졌다.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한참 해수욕을 즐겼다. 이왕 시작된 추억팔이, 물에 젖은 모래로 모래성도 쌓아본다. 모래를 파면 물이 고이고 성이 높아지고 호수가 생긴다. 호수사이로 뭔가 둥근 것이 만져져서 꺼내 보니 골뱅이다. 깡통에 들어있는, 을지로에 가면 먹을 수 있는 바로 그 골뱅이. 제법 커서 아이의 주먹만한 그것을 들고 어리둥절하고 있는 사이에 옆에 있던 아주머니들은 본격적으로 채집에 들어간다.  “두껍아, 두껍아” 노래를 부르며 작은 언덕을 파보면 영락없이 들어있다. 얼마나 신나고 재미있는지. 열 마리 남짓 잡은 것을 저녁상에 올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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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놀이 끝의 저녁 
바다의 시간은 현실과는 다른가보다. 밀물이 들어와 바다와 파라솔이 가까워진 것을 알아차리니 배가 고파온다. 일단 숙소로 가기로 한다. 숙소는 근처 숲속에 위치한 펜션. 앞에는 밭이고 뒤에는 산이다. 바다 뷰는 커녕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는 깜깜 시골이다.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숙소 근처에 봐두었던 화덕피자집으로 갔다. 피자를 고르고, 더 신중하게 독일맥주를 골랐다. 피자를 굽는 사장님과 노닥노닥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떤 여자 분이 들어오시는데 너무 낯이 익어서 나도 모르게 인사를 했다. 여유롭게 인사를 받아주던 분은 TV 드라마에서 엄마 역으로 자주 봤던 중년 여배우였다. 근처에 살고 있다며 맥주 한 잔 하러 왔다고 기분 좋게 나누는 대화 속에서 여행의 즐거움을 하나 더 얻는다. 이 곳에서 먹은 기름기 쪽 빠진 화덕피자도 별미였지만 역시 함께 마신 독일맥주가 훌륭했다. 하늘에 별이 유난히 많았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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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독일마을 
다음날은 일찍 남해 삼동면 물건리에 위치한 독일마을로 가보았다. 60년대 산업역군으로, 독일에 파견된 간호사와 광부 교포들을 위해 만들어진 주거지이자 독일문화를 체험해 볼 수 있는 관광지다. 전통 독일양식으로 지어진 주황색 지붕의 집들이 바다와 산과 보기 좋게 어우러진 풍경을 내려보는 전망대를 시작으로 길을 따라 내려갔다. 간호사와 광부가 맥주를 따라 마시는 관광안내소의 벽화가 재미있고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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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를 시작으로 거리며 상점이며 맥주가 즐비했는데, 어김없이 더운 날씨에 아침부터 맥주 생각이 간절했다. 여기저기 돌아보는 것을 깔끔하게 포기하고 대신 전망이 아주 좋은 시원한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여행 기분을 내며 이것저것 시켜봤다. 아침 식사한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다시 풍성하게 차려진 테이블을 마주했다. 낮에 마시는 독일맥주는 그 부드러움과 향기로움에 별이 다섯 개. 주변을 돌아보니 많은 사람이 우리와 비슷하게 독일 마을을 즐기고 있었다. 오늘 같은 날은 이게 정답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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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오름 예술촌
이동하는 차 안에서 늘 잠을 자는 나는 이번 여행에서는 잠든 적이 한 번도 없다. 밖을 내다보는 재미가 그만큼 좋았다는 뜻이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바다와 섬들, 건물들은 스쳐가며 눈으로만 구경했다. 그러다 특이한 건물을 발견했는데, 그 곳은 폐교를 개조한 해오름 예술촌이었다. 외부를 독일 양식으로 개조해 독일 마을과 일관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오래된 학교라서 바닥의 마루가 다 올라와 있고 걸을 때 마다 소리가 나는 그곳은 말 그대로 예술촌.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예술에 대한 이것저것 잡다한 것들이 아기자기하게 모여 있었다. 도예나 알 공예, 황토, 칠기 등을 체험할 수 있었고 민속자료나 옛날교실의 모습 등이 전시되어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적당했다. 입구에는 화가 한 분이 관광객들의 캐리커처를 그려주고 있는데 내가 본 캐리커처 화가 중 제일 닮게 그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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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무리 학교
예술촌에서 나오는 길에는 양무리 학교를 찾아갔다. 노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목장으로 입장료를 드리자 확인도 하지 않고 전대에 쑤셔 넣으시며 풀 바구니를 주셨다. 이제 이걸 들고 들어가서 동물들에게 주면 되는 것이다. 길을 따라 올라가니 금방 양들이 나타난다. 동화 속이나 상상 속의 새하얗고 예쁜 양들은 확실히 아니다. 갈색에 가까운 사실적인 그것들에 헉, 하고 뒷걸음질을 치게 되지만. 그렇게 넋 놓고 있다가는 곧 바구니를 강탈 당한다. 

거칠게 달려들어 바구니를 떨구거나 사료를 내민 손을 침 범벅으로 만들어 놓는 터프한 녀석이 있는가 하면, 우리가 마치 투명 인간이나 되는 듯 전혀 신경도 안 쓰고 유유히 풀을 뜯어 먹고 있는 녀석들도 있다. 가져간 사료가 다 떨어지자 따라다니던 양들도 볼일 다 본 것처럼 시큰둥해지고 그제야 나도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위로 해상공원의 아름다운 섬들이 떠있다. 바다를 향한 벤치에 앉아 한참 눈 호강을 하다보면 그렇게 양들이 부러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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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쌈밥 한 상 
남해 여행에서는 남해의 별미라는 멸치쌈밥도 놓칠 수 없다. 갈치조림이나 고등어조림 같이 매운 양념으로 생멸치를 졸여내 상추에 쌈 싸먹는 요리다. 멸치라지만 살을 발라 먹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생선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생긴 건 좀 그런데 비리지 않고 담백한 맛이 신기하다. 같이 나온 반찬들도 어느 하나 나무랄 데 없이 제 가격을 하는 식사였다. 역시 실망시키지 않는다.

남해는 풍경이 참 좋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모든 게 감각적인 주인의 손길이 닿아있는 멋진 카페 인테리어 같다. 어디든 눈을 돌리면 시원한 바다와 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고 차 안에 무슨 음악을 틀어놨든 다 잘 어울리는 풍경이다. 밖으로 손을 내밀어보면 그 풍경이 가진 공기도 만져볼 수 있으니 이걸 어찌 사진이나 글로 대신 할 수 있을까. 곧 가을이 되면 맥주 페스티벌도 열린다고 한다. 또 가야할 이유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