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eless
Kim, Changhoon

김창훈은 흑석동으로 우릴 불렀다. 지난 10월 6일, 4집 <호접몽>을 발매하고 보름 정도 지났을 때였다. <호접몽>에 수록된 ‘흑석동’ 뮤직비디오의 장면이 순간 확 스쳐 지나갔다. 거기엔 향수로 얼룩진 흑백의 흑석동이 있고, 김창훈의 어린 시절 추억이 있다. 

흑석동은 산울림 삼 형제가 자랐던 동네다. 미국에 사는 김창훈이 한국에 온 건 새 앨범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오랜만의 귀국도 아니었다. 어머니도 보고, 음악 일도 해야 해서 자주 오기 때문에 빠르게 변하는 서울도 그리 낯설건 없다고 했다. 흑석동에서 김창훈과 이야기를 나누며 개발의 흔적 뒤로 남은 골목길 사이사이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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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접몽(胡蝶夢)
한국에선 어디에 머무세요? 
흑석동에 머물 때도 있고, 형 있는데 가서 머물 때도 있어요. 흑석동이 우리 고향인데, 어머니가 방배동 사셨다가 이리로 다시 이사 오셨거든요. 우리가 살 때만 해도, 여기가 이렇게 개발되진 않았어요. 전부 달동네였죠. 여름 되면 물에 잠기고 그랬어요. 이 동네가 그렇게 가난한 동네였지.  

이번 앨범의 ‘흑석동’에도 어린 시절의 기억을 담으셨나요? 
그런 부분도 있지만, ‘흑석동’은 여러 상징적인 의미를 담은 노래예요. 내 고향에 대한 향수가 될 수도 있고, 옛 추억, 그리고 산울림 팬들한테는 우리 막내가 세상 떠나기 전의 모습을 생각나게 하는 장소가 될 수도 있겠죠. 흘러간 과거, 젊은 시절, 그 사이의 여러 만남들. 오늘 내가 서 기자하고 이렇게 만났지만, 이 만남도 언젠간 다 순간이 되고, 과거로 넘어가 버릴 거예요. 그런 만남에 대한 생각들, 그땐 내가 왜 그렇게 철이 없었을까 하는 후회들…. ‘흑석동’은 이렇게 여러 가지 의미를 아우르는 곡이죠.

‘흑석동’ 뮤직비디오에서도 실제 흑석동 골목길의 모습을 담으셨죠. 
우리 얘기 다 하고 나서, 거기 한번 같이 가볼까요? 주변은 전부 아파트만 보이고 그렇지만, 조금만 위로 올라가면 우리 살던 시절의 모습들이 다 남아있어요. 골목 구석구석이 아직도 옛날 그 모습 그대로예요.

너무 좋아요. (웃음) 요즘 <호접몽> 앨범을 매일 듣거든요. 듣다 보니 공연장에서 뵙고 싶단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말인데, 선생님의 마지막 공연은 언제셨어요? 
그거 예리한 질문이에요. 왜냐하면, 마지막 공연이 산울림 LA 공연이었는데, 그게 2007년이었거든요? 그때 막내가 밴쿠버에 살았는데, 공연하러 LA로 왔어요. 공연은 환상적이었어요. LA의 정취도 멋있었고, 모든 게 완벽했죠. 즐겁게 공연을 마치고 나서 막내가 버스 타고 가는데, 형이랑 저랑 “잘 가라 막내야, 수고했다” 하고 그렇게 보냈어요. 근데 그게 마지막이 된 거예요. 인생을 살다보니 그런 헤어짐도 있더라고요. 그래서 ‘흑석동’에도 그런 정서가 담기게 된 거예요. 노래 가사가 ‘웃으며 보냈네, 웃으며 보냈네’ 잖아요? 정말로 나는 그게 우리의 마지막인지 모르고, 웃으며 보냈었어요. 

2007년이면, 산울림이 30주년을 넘긴 해였어요. 
제일 아름다운 공연이, 제일 슬픈 공연이 되어버렸죠. 산울림은 거기까지였고요.

사람들은 곧 ‘산울림 40주년’이란 얘길 할 거예요. 기념 공연도 기대할 거고요. 
산울림이란 이름을 형이 쓰기 싫어해요. 산울림은 삼 형제의 이름이니까. 그렇지만, 산울림의 음악을 좋아하는 분들은 분명 산울림 40주년을 기대하리란 것도 알아요. 사실 형과 함께 형제 공연은 할 생각이 있어요. 미국 투어 형식으로 해서요. 그게 역으로 바람이 불어서, 한국에서도 공연을 소원하시는 분들이 있으면 한국 공연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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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훈 4집 <호접몽>

<호접몽>의 ‘아버지’란 곡도 공연장에서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충분히 가능하죠. ‘아버지’는 형이 기타를 쳐줬으니까 같이 부르면 의미도 더 있을 거 같고요.

<호접몽>을 내시면서 “젊은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고 하셨어요. 
‘젊다’는 건,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젊은 생각, 진보적인 생각, 구습에 젖지 않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거예요. 10대, 20대 같은 나이의 젊음보단 생각의 젊음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어요. 

저희 세대는 김창훈의 음악에서 장기하와 얼굴들을 떠올리기도 해요. 사실 음악을 만드는 쪽, 음악을 듣는 쪽 모두 산울림의 수혜자니까요. 
인디에서 워낙 두각을 나타냈고, 지금은 거의 주류화 돼 있는 팀이죠? 산울림도 좋아해 주는 걸로 알고 있어요. (웃음) 젊은 아티스트의 음악과 저의 음악이 유사한 부분이 있다고 하면, 상당한 호평이 아닌가 해요. 

앨범을 만들면서 어떤 부분을 신경 쓰셨어요? 
요즘 가요계가 돌아가는 걸 보면, 순기능도 참 많지만 부족한 면도 있다고 봐요. 그런 부분을 채울 수 있는 음악으로 4집을 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을 굉장히 많이 했죠. 

그 부족한 부분은 이를테면 다양성 같은 건가요? 
다양성도 있고, 주제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어요. 요즘 많이 조명 받고 있는 음악과는 다른 주제, 좀 더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음악을 하고 싶었어요. 저는 여러 후배의 선배이기도 하잖아요? 음악을 한 40년 한 사람으로서, 이런저런 바람을 담아 만들어 봤어요.

‘커피 마니아’를 들으면 선생님은 정말로 커피 중독자인가 싶고, ‘코엑스 러브’를 들으면 20대 젊은 청년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고 그래요. 
(웃음) ‘호접몽’같이 인생을 관조하는 노래만 담으면 아무래도 호불호가 좀 갈릴 수도 있지 않겠어요? 전 항상 청자를 생각해요. 사랑을 주제로 한 노래는 많이들 있으니, 이번 앨범엔 사랑의 주제를 삼분지 일, 가족과 사회의 얘기도 삼분지 일, 인생에 대한 것도 삼분지 일 넣어서 이런저런 얘길 해보고 싶었어요. 다만, 너무 구체적으로 이 곡은 이렇다, 저 곡은 저렇다 설명하는 건 청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곡을 듣고 느끼는 건 각자의 몫이니까.

그렇지만 ‘4월의 눈물’은 그 의미가 당장 명확하게 와 닿는 곡이에요. 
누구나 의미를 알 수 있는 타이틀이죠. 직접적으론 세월호와 관련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이별’이죠. 세월호 유가족분들의 아픔은 사실 우리가 오롯이 공감하기 어려워요. 저는 비슷하게나마 막내의 갑작스러운 사고사를 접했기 때문에, 그분들의 아픔을 조금은 공감할 수 있었어요. 

앨범 수록곡 통틀어서 가장 경쾌한 곡이기도 하고요. 
처절하고 슬픈 곡들은 다른 아티스트들이 많이 썼으니, 슬픔을 좀 시원하게 내질러 볼 수 있는 곡을 써보는 것도 마음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어요. 하지만, 노래가 마냥 경쾌한 것도 아니에요. 패러독스(Paradox)의 정서가 있죠. ‘4월의 눈물’을 들으면, 거기 기타소리, 북소리가 마치 아주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거든요. 

말씀 듣다 보니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요. 선생님은 왠지 편견에 대해 엄격한 분일 것 같아요. 편견이 강한 사람은 상대를 헤아리는 마음이 부족하고, 헤아림이 부족한 사람은 이렇게 가슴에 확 꽂히는 곡들을 쓰지 못할 것 같아요. 공감하는 방법을 모르니까요. 
(웃음) 부족해요. 늘 부족해요. 사람은 교만하기 쉽고, 자기 위주로 우주가 돌아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함정에 빠져들기 쉽죠. 그래서 항상 조심해야 해요.

공자 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그런데 앨범에선 장자 이야기를 하셨죠. 인간이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인간이 된 것인지, 하는. 
나이가 벌써 육십인 것도 있고, 앨범을 듣는 분들은 산울림 40년의 경륜을 배경으로 들으실 거 아니에요. 팬들이 기대하는 주제, 나이에 맞게 표현할 수 있는 주제, 저와 비슷한 나이의 분들이 공감할 수 있는 주제가 ‘호접몽’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인문학적인 주제가 담긴 가요가 그렇게 많지 않아요. 뭔가 좀 다른 얘길 할 수 없을까 하다가 나온 게 ‘호접몽’이었고, 앨범 타이틀도 이 단어로 정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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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ove Will Keep Us Together
산울림은 주류 음악과는 결을 달리하는 독창적인 음악으로, 1970년대 대중음악의 혁명을 일으켰다는 평가를 받는 록 밴드다. 1977년 <아니 벌써>로 데뷔한 후, 1997년 산울림의 마지막 앨범 <무지개>까지 정규 앨범만 13장을 발매했다. 김창훈은 ‘회상’ ‘산할아버지’ ‘내 마음(내 마음은 황무지)’ ‘무지개’ 같은 산울림의 곡 외에도, 김완선의 ‘오늘 밤’과 ‘나 홀로 뜰 앞에서’, 샌드 페블즈의 ‘나 어떡해’ 같은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서 선명한 족적을 남긴 명곡들을 작곡했다. 김창훈의 첫 솔로 앨범은 1992년에 나왔는데, 생업을 이유로 산울림 활동을 하지 못했던 시기를 조금 지나 나온 앨범이었다.
 
산울림 9집 이후 간간히 활동을 하긴 하셨지만, 연기와 음악 활동을 꾸준히 병행하시던 김창완 선생님과는 다르게 직장 생활을 하며 일반인의 삶을 사셨어요. 
수입이 없어서, 생활이 안 돼서였죠. 삼 형제가 다 음악 하면 돈을 못 버니까, 저하고 동생은 취직할 수밖에 없었어요. 당시 음악적 생태계를 보면, 기획사나 레코드 회사는 가수의 이름을 띄워주고, 가수가 벌어들인 판매 수익을 전부 가져갔어요. 가수는 밤무대 올라가는 게 주된 수입이었죠. 거기서 개런티가 어마어마하게 나오거든요. 근데 우린 그런 정서와는 맞지가 않았어요. 술 먹는 데서 어떻게 공연을 하느냐, 그런 보수적인 생각을 했죠. 레코드 발매해봐야 돈 얼마 못 벌어요. 콘서트 수입도 다 기획사에서 가져갔고. 그래서 직장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죠.
 
그러다가 솔로 앨범을 발매하게 된 데는 어떤 계기가 있으셨나요? 
일 하느라 산울림 활동은 거의 못했는데, (김)완선이 매니저가 연락 와서 곡 좀 써달라고 한 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완선이 데뷔앨범을 만들게 됐고, 그게 반응이 좀 있어서 2집 곡도 쓰게 됐죠. 미국 들어가서 곡을 썼으니, 나는 완선이가 스타덤에 오른 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그렇게 음악과는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했죠. 그래도, 미련이 안 없어지는 거예요. 내가 이러다간 음악을 영원히 못 할 수도 있겠구나 싶은 거야. 그래서 곡을 쓰고 1집을 내게 됐죠. 몇 년 지나선 산울림 13집도 나왔고.

그 앨범이 <무지개>였죠. 
사실 그땐 산울림이 지금 같이 뜨겁진 않았어요. 2000년도 들어오면서 젊은 아티스트들이 산울림 노래를 부르고 트리뷰트 앨범을 내면서 재조명받았죠. 그런 움직임이 있어서, 산울림 30주년에 투어를 돌게 된 거고요.

음악과 일을 병행하는 건, 나름의 엄격한 룰이 있지 않으면 힘든 일이었을 것 같아요. 
직장 다니면서 작업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음반 발표라는 것도 다 때가 있잖아요. 이쯤 되면 내야 할 것 같다, 하는 생각이 들면 내고, 좀 있다가 또다시 갈증이 생기면 또 다시 내고, 이게 4집까지 온 거예요. 그리고 음악이라는 게 평온한 상태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산고(産苦)처럼 마음이 아주 요동칠 때 나오기도 하거든요. 그렇게 마음이 심란하고 어지러울 때 곡이 나와요. 그런 경험을 하고 나온 앨범도 있었죠.

3집부턴 인디레이블에서 쭉 앨범을 내고 계시죠? 
예전에 <탑 밴드> PD가 연락 온 적 있었어요. 산울림 노래랑 완선이 노래를 좀 쓰겠다고, 허락해 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러라고 했죠. 근데 마침, 산울림 노래를 부른 톡식이 우승했어요. 그래서 내가 그 친구들도 보고 싶고 해서, 서울 왔을 때 만나서 밥을 사줬어요. 그러면서 앨범은 어디서 내냐고 물어봤지. 그러니까 미러볼뮤직에서 낸다고 그러대? 미러볼 대표님 만나 뵈니까 나랑 아주 잘 맞고 좋은 분이셨어요. 그리고 미러볼에서 워낙 좋은 앨범이 많이 나오더라고요. 그 인연이 이어져서 이번 4집도 같이 내게 됐어요.

<호접몽> 발매하시고 나서 산울림매니아 분들과 만나 약주 한잔 하셨단 이야길 들었어요. 팬들은 어떤 이야기를 하던가요? 
내 입으로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 (웃음) 여느 때보다도 뜨거운 것 같아요. 호평을 굉장히 많이 들었어요.

그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청자들이 이전 앨범과 다른 차별성을 느낄 수 있는 이유 하나는, 곡을 쓰는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이에요. 한 2년 전에 풀타임 잡을 그만뒀거든요. 그렇게 되면서 내 생활이 1982년 이전의 라이프로 돌아간 거예요. 35년 만에 온전히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긴 거죠. 그 시간이 전부 이 앨범에 담겼다고 생각하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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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찬가
내년이면, 선생님이 음악을 시작하신 지 40주년이 넘어가요. 돌이켜보면 어떠세요? 
우리는 처음에, 우리가 만든 음악이 객관화돼서 손에 잡을 수 있다는 거 자체가 너무 좋았고, 거기에서 오는 희열이 컸어요. 그리고 그땐 학생이었으니까, 음악에만 열정을 갖고 보람을 느끼던 시절이었죠. 수입이 없어서 쫄딱 굶게 생겼구나, 하는 그런 힘든 시절도 동시에 겪었지만, 정서적으론 굉장히 윤택한 삶을 살아왔던 것 같아요. 음악을 하면서, 마음만은 늘 부자였던 거죠.

산울림의 음악을 끈임없이 재생산해내는 후배들을 보면 어떤 마음이 드세요? 
영광일 건 말할 것도 없고, 어떤 자부심마저 느끼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들이죠. 시간이 지나도 계속해서 음악이 회자된다는 게 우리한텐 굉장히 큰 사건이에요. 밴드 이름은 몰라도, 곡은 다들 알잖아요? (웃음) 음악 하는 데 큰 원동력이 되죠.    

산울림이나 들국화 같은 록 밴드가 전성했던 시절을 품은 세대가 아닌 입장에서 여쭤보고 싶어요. 그런 시절이 다시 왔으면 하는 생각도 하세요? 
저뿐만 아니라 많은 분이 거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죠.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신다는 것도 알아요. 요즘은 페스티벌 같은 공연 문화가 많이 활성화됐기도 하고요. 그러면서도, 이건 아닌데, 하는 충격적인 부분도 분명 있죠.

그게 어떤 걸까요? 
해외 아티스트들을 부르면 상당한 개런티를 주잖아요. 근데 국내 아티스트한텐 왜 그만큼 대우를 못 해주냐는 말이에요. 왜 국내 아티스트한텐 갑질을 하느냐 이거예요. 자국의 아티스트들을 대우해주고 토양을 만들어주는 게 중요한데, 그런 부분은 무시하고 요란하게 페스티벌만 하면 되나요? 

스스로 직업이 없다고 생각하는 밴드들을 여럿 봤어요. 물론 음악과 직업을 연관 짓지 않는다는 마음도 있지만, 밴드 해선 돈을 못 버니까 직업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어요. 
현재의 음악적 생태계가 좋은 쪽으로 변화되려면 국내 뮤지션들에게 정당한 대우를 해 줘야 해요. 록이 다시 부흥하고 말고는 그 다음 문제겠죠.

밴드 하는 후배 중에 괜찮다, 싶은 친구가 있으세요? 
사실 저는 음악을 찾아 듣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그냥 이렇게 지나가다가 나오는 음악 정도나 듣는 정도지, 즐기진 않아요. 많은 음악을 들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당장 누가 괜찮다고 얘기하긴 어려워요. 그래도 장기하와 얼굴들, 국카스텐, 그리고 (<파운드 매거진> 2016년 10월 호를 들추어보며) 여기 십센치 같은 친구들처럼, 각자가 추구하는 새로움이 있고 명확한 아이덴티티가 있는 후배들은 항상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에요.

말씀을 들으니, 많은 래퍼런스가 창작의 필수 조건은 아닌가 봐요. 
이거, 내 치부를 드러냈네요. (웃음) 사실 코드도 많이 몰라요. 베이직 코드 몇 개로 음악을 만들다 보니, 머릿속에 있는 음과 실제 코드를 매치할 때 어려움을 겪는 일도 있죠.

음악을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으세요? 
각자의 자기표현 방법이 다 있잖아요. 나는 음악이 좋고, 음악 하는 사람이니까 음악으로 표현하는 거죠. 더욱 금상첨화인 건, 음악을 찾으시는 분들이 있다는 거죠. 듣는 사람이 없다는 건 음악 하는 사람 입장에선 굉장히 공허한 거예요. 그런데 음악을 기다리시는 분이 있으니까 음악을 계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돼요.

음악으로 40년의 세월을 사셨어요. 사람이 나이가 들면 유해진다고도 하잖아요. 선생님의 경우는 어떠셨어요? 
변한 것도 있고, 안 변한 것도 있죠. 사람의 성향이나, 기질 같은 건 잘 안 변해요. 그리고 나이가 팔, 구십 돼도 철이 안 들 수도 있어요. 나이 드신 분이라고 해서 반드시 지혜로운 것도 아니잖아요. 나이를 먹어도 젊은 사람보다 더 치졸한 결정을 할 수도 있고, 마음이 더 갈대 같아질 수도 있고, 원한을 더 깊이 가질 수도 있어요. 나이 든다고 선해지고 그런 거 아니에요. 그래서 항상 경계해야죠. 
 
선생님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세요? 
저에게는 늘 오늘만 있어요. 이렇게 보람 있는 만남을 가지고, 할 일을 하는 거죠.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그렇게 내 할 일 다 하고, 나머진 그냥 맡겨버리는 거예요. 앞으로도 똑같아요. 일이 잘되면 좋은 거고, 혹시나 좀 잘못되어도, 어쩌겠어요. (웃음) 사는 게 다 그런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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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찰나와 영원
김창훈은 이따금 앨범에 실린 한 곡, 한 곡에 대한 느낌을 물어왔다. 수록곡들에 대한 에디터의 생각은 뮤지션의 의도와 정확하게 마주 볼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당장 노랫말부터 ‘사랑해, 사랑해’ 하는, 사랑 노래인 ‘코엑스 러브’에선 혼자 남은 외로움만 느꼈다고 에디터가 대답했을 때, 김창훈은 오히려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저마다의 경험과 해석이 다 다르므로, 같은 노래라도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이는 게 당연하단 생각 때문이었다.

김창훈의 한 곡, 한 곡엔 수많은 감정의 갈래가 교차한다. 뮤지션이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깊이와 무게 때문이다. 1977년, 주류에 편승하지 않은, 오롯이 새로운, 그래서 독보적인 음악을 세상에 뿌린 산울림은 2016년의 김창훈으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김창훈이 남긴 음악적 성취는 과거보단 현재의, 현재보단 미래의 이야기여야 한다.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을, 단단한 가치가 그 중심에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