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 > 최준석(건축가, <어떤 건축> 저자) 포토 > 김희언,예화랑
Intermezzo for Deleuze’s city
들뢰즈의 도시를 위한 간주곡_예화랑
들뢰즈 따라하기
90년대 중반 들뢰즈(Gilles Deleuze)가 자신의 아파트에서 투신한 후 한국엔 난데없이 들뢰즈 열풍이 불었다. 개념에 늘 목말라 있는 예술가들과 작가들은 자신만의 개념을 만들기 위해 들뢰즈의 세계에 한발 집어넣고 간을 봤다. 거장의 어록으로부터 내 생각을 풀어나가야지. 그러면 누구라도 쉽게 나를 공격할 수 없겠지. 수많은 사람들이 죽은 들뢰즈의 주변을 기웃거렸다. 하지만 들뢰즈는 무척 어려웠다. 해석도 제각각이었다. 복잡한 암호 같았다. 삶은 펼침, 죽음은 접힘. 들뢰즈는 기꺼이 몸을 날려 접힘의 세계로 가버렸지만 남은 사람들은 여전히 잘 펴지지 않는 그의 생각을 펼쳐보려 안간힘을 썼다. 건축가도 그들 중 하나다.
건축가는 뭔가를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그 뭔가는 단지 서있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그 안에서 사람이 살아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다. 쉽지 않은 일이다. 일단 편하고 효율적인 집을 만들어서 사람들의 생활을 해결하는 게 급선무지만, 그러면서도 예술로서의 가치와 개념을 담아야 한다. 들뢰즈가 건축가들에게 환영받은 이유는 ‘생활 vs 예술’ 같은, 섞이기 힘든 두 개의 대립 항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힌트를 제시한 점이다. ‘접힘과 펼침’은 그런 측면에서 건축가들의 눈을 번쩍 트이게 했다. 접고 펼친다는 어감이 워낙 건축적으로 잘 어울렸을 뿐만 아니라, ‘접힘과 펼침’에서 말하는 들뢰즈의 생각은 건축적 이미지로 전환시키기에 편리했다. 들뢰즈는 접힘과 펼침을 서로 양립하는 대립 항이 아닌 상호보완적인 관계라고 설명했다. 즉 별개로 떨어진 개념이 아니라 늘 붙어 다니며 교류하는 짝으로 본 것이다. 어느 한쪽이 없다면 존재가치 자체가 사라지는 관계, 암수한몸의 유기체로 세상을 해석했다. 건축가들은 들뢰즈가 내린 정의에 자신의 개념을 대입해 건축을 ‘접힘과 펼침’의 대상으로 보고 이미지를 뽑아냈다. 어감도, 내용도 건축이 활용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하고 싶은 대로 만든 다음 갖다 붙여도 뭔가 있어 보이는 내용으로 만들어주는, 이를테면 도깨비 방망이 같은 개념이었다고 할까. 게다가 활용도를 더욱 극대화하는 쐐기 개념이 있었으니 바로 ‘리좀(Rhizome)’이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언제나 중간에 위치하며 사물들 사이의 간주곡으로 존재하는 리좀. 확실하게 연결되는 나무줄기와 가지 같은 관계가 아니라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로 이어지는 쿨한 결연관계로 구성되는 관계에 대한. 세상을 바라보는 들뢰즈의 예리한 시선, 건축가는 건축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니 들뢰즈의 세상이 건축가에겐 건축이었을 테다. 단순한 이미지 차용에 불과하더라도 들뢰즈를 들먹거렸던 건축은 결국 세상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니까. 건축은 늘 그렇게 한발 앞서가는 세상의 뒤를 힘겹게 좇으며 살아왔다.
풍경의 가능성, 예화랑
몇 년 전이다. 자주 다니던 동네에 건물 하나가 들어섰다. 어느 날 골조공사를 막 끝낸 콘크리트 덩어리를 우연히 봤다. 매일 지나던 길이었는데 그 전에는 눈에 띄지 않았다. 작은 주택과 건물들 사이에 쑥 솟아 보일 만큼의 크기였는데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벽을 세우고 창을 뚫고 대충 돈 들여 치장하고 임대를 놓고 이익을 얻고, 늘 그렇듯 그런가 보다 했다. 공사장 주변을 오가며 건축을 한다는 내가, 판단하고 예상할 수 있는 건 고작 그 정도였다. 단지 크다고 해서 바라보게 되는 것도 아니었고, 잔재주를 부려 겉을 그럴싸하게 둘렀다 해서 감탄하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 무렵 그렇고 그런 서울의 도심지에서 새로운 건축물이 세워지는 과정을 본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그때 그 덩어리를 봤다. 투박한 콘크리트를 막 뒤집어 쓴 채, 몇 개의 껍질이 쪼개진 조금은 희한한 모습의 덩어리. 건물 벽면과는 어울리지 않는 막힌 판이 여러 개 겹쳐져 세워졌다. 그것은 마치 양파의 껍질 같은 느낌이었는데 껍질 뒤에 또 다른 껍질이 있을 것 같은, 그래서 결국 껍질과 껍질이 수북이 겹쳐진 것 같은 색다른 풍경을 보여주었다. 동네는 아파트를 마주보는 대로변으로 제법 덩치가 있는 중층 건물들이 적당히 들어서 있었고, 그 뒤의 이면도로 쪽으로는 오래된 단독주택들과 집장사표 상가건물들이 섞여있었다. 단독주택이 점점 헐려나갔고 임대형 상가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섰다. 아파트와 중심지역을 잇는 좁다란 지름길 주변의 주택들도 하나둘 카페와 옷가게로 바뀌어나갔다. 한적한 주택가에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동네의 풍경이 천천히 바뀌고 있던 시기였다.
엇비슷한 군중들 사이에 우뚝 솟은 예술가의 느낌.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감을 만드는 다분히 조각 작품의 형식을 띈 건물이었다. 접고 펼쳐서 세운 몇 개의 껍질은 다른 건물처럼 평면적으로 보이는 단순한 벽이 아니었다. 그 사이사이 틈과 공간을 지닌 입체로 읽혔다. 그러니까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벽이 그냥 벽 한 장이 아니라 벽과 공기와 또 다른 벽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방식이었다. 들뢰즈의 말대로 그냥 밋밋하게 존재하던 뭔가에 ‘접힘과 펼침’이라는 요소를 첨가하여 그 둘이 하나의 쌍으로 움직이면서 예기치 못했던 새로운 풍경을 보여주었다고 할까. 벽 하나 달랑 세워진 주변 건물들의 입면과 강하게 대비되면서 평면적이던 동네풍경이 입체적으로 살아났다. 건축가는 예화랑을 통해 건물의 벽이 단지 벽이 아닌 소통하고 이야기하는 제스처를 담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로 이어지는 낯선 관계의 이미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예화랑은 스스로 하나의 독립적인 풍경이 되었다. 이것은 마치 아무런 의미 없이 존재했던 종이 한 장을 다양한 방식으로 접어 학을 만들고, 배를 만들고, 비행기를 만드는 원리처럼 동네를 환기시켰다. 평면 뒤에 숨어있던 의미들이 접고 펼쳐지면서 다양한 가능성으로 새롭게 표현된 ‘도시의 종이접기’다. 들뢰즈가 말했다. 미끈한 막이 주름의 표피로 변화하는 것은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한다고. 건물의 막을 단순한 막으로 처리하지 않고 주름지게 하여 가능성의 일면을 건축적인 실제풍경으로 시도해본 것이 예화랑이다. 이 시도는 성공했을까. 들뢰즈는 또 말한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언제나 사물들 사이의 간주곡으로 존재한다.” ‘리좀’의 도시를 위한다면 예화랑의 시도는 시작도 끝도, 성공도 실패도 아니다. 그저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로 이어지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도시가 그 과정이 만들어낸 풍경들을 충분히 즐기고 있는지, 찬찬히 살펴볼 일이다. 성공과 실패만으로 판단하는 도시엔 어떤 가능성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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