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스 스피치
(The Kings Speech,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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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킹스 스피치(The King’s Speech, 2010)>

한강변 어디 풍경 좋은 장소나 다우닝가 10번지처럼 종로나 용산 어느 거리 한켠에 대통령의 집무실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주변 건물과 분위기에 조화롭게 이웃하면서 적절한 크기와 용도의 공간들이 필요한 만큼 갖춰진 공간에서 국민들과 호흡하는 모습을 보였더라면 지금의 슬픈 현실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사생활을 담는 관저까지 그리 하기엔 힘들었겠지만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정업무의 퍼포먼스가 열린 공간과 건축을 통해서 시민들과 수시로 소통할 수 있었다면 굳이 근사한 ‘말’이 아니더라도 대통령은 공간 스스로 웅변하는 메시지를 통해 국민과 좀 더 친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농구경기를 할 수 있을 만큼 크고 넓은 막막한 집무실에 홀로 앉아 하루 종일 무엇을 하며 사는지, 바깥의 국민으로선 알 도리가 없는 삶을 살아온 대통령은 결국 스스로 대화를 거부하며 살아온 대가로 불행한 상황을 맞고 있다. 봉건시대 궁궐 같은 집에서 귀찮고 거추장스러운 소통을 거부하고 오로지 자신 주변의 몇몇 사람에게만 말하며, 그 말에 힘과 권력을 보태준 결과다.   

나라를 뒤흔든 최근 사태의 가장 중요한 본질 하나는 ‘불통’에서 모든 것이 출발했다는 점 아닐까. 소통의 기본은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다. 입을 열기 전에 먼저 귀를 여는 것. 입은 말이 나오는 곳이고 귀는 말이 들어가는 곳이다. 그러니 좋은 대화는 상대의 말과 내 말이 유기적으로 섞여서 서로의 입과 귀를 들락거리며 순환하는 과정(약간 에로틱한 이미지가 상상되기도 한다)이다. 불통을 원하는 사람에겐 내 입과 상대의 귀만 있으면 된다. 나는 말을 하고 상대는 듣기만 하는 관계가 불통이니까. 듣지 않으려하고 말을 하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하고(해놓고 다른 사람 표정이 왜 저런지 잘 모르고) 자기 말만 일방적으로 주입하고 그 말에 반대하는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다.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은 모두의 공통된 관심사다. 말을 잘 하는 사람도 좀 더 잘 할 수 없을까를 고민하고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은 그 이유 하나로 인생을 살아갈 힘을 잃기도 한다. 말을 곧잘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조차 어떤 상황에서 말을 더듬거나 이어갈 다음 말을 까먹어 진땀 빼는 경험을 하게 되면, 말에 대한 자신감을 잃게 되어 그런 상황을 자꾸만 피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나의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점점 더 알 수 없는 지경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말은 내가 나 아닌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태도의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말을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말의 기술이 부족하다는 의미이기 전에 ‘관계’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다. 지독한 눌변이라도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생각에 집중해서 천천히 진심을 전하다보면 막말로 온 우주가 도와줄 수도 있고, 상대방 역시 말하는 사람의 마음이 뭔지 알 수가 있게 된다. 물론 이 역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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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킹스 스피치(The Kings Speech, 2010)는 제대로 말을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왕을 승계해야할 에드워드 8세가 유부녀와 사랑에 빠져 떠나는 바람에 얼떨결에 왕이 된 ‘앨버트’ 왕자는 언어 장애가 있는 말더듬이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자신의 핸디캡을 일종의 절망적 장애로 여기고 정체성 혼란을 겪으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하지만 주어진 엄중한 책임을 포기하지 않고 말을 조금이라도 잘하고 싶어 끝없이 노력한다. 유능하다는 언어 치료 선생들을 만나 온갖 훈련을 다 해봐도 나아지지 않던 그의 스피치는 ‘라이오넬 로그’라는 괴짜 언어 치료사를 만나면서 달라지기 시작한다. 변변한 학위 하나 없던 비주류 인생 로그는 알버트 왕자를 ‘버티’라는 애칭으로 함부로 부르며 욕을 가르치고 돈내기를 하는 식의 엉뚱한 방식으로 말을 가르친다.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고 영국이 참전을 결정한 순간 말더듬이 왕은 영연방 국민 모두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연설을 해야 할 순간에 직면한다. 로그와 비좁은 방송실에 단 둘이 들어간 로그는 말더듬이 왕을 위해 창문을 열고 주변을 환기시킨 후 왕 앞에 서서 마치 지휘자처럼 왕의 말하기를 돕는다. 왕은 로그의 눈을 바라보며 로그의 표정에 맞춰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나간다. 하지만 느리게 단어를 곱씹으며 더듬거리며 뱉어내는 왕의 스피치는 위기에 몰린 영국인들에게 전쟁에 맞서는 각오와 다짐을 주기에 충분했다. 앞에 서 있는 친구에게 진심을 전하듯 또박또박 전달하는 지도자의 말 한마디. 말이 힘을 갖는 때는 그것의 유창함과 현란함이 아닌 말에 담긴 마음과 생각, 다짐과 각오가 드러날 때라는 것을 영화는 우리에게 전한다. 

알버트 왕자가 처음 로그를 만나 그의 상담실에서 첫 말하기를 할 때, 로그는 먼저 창문을 열어 왕 내면에 고립된 공간감을 풀어주려 했다. 말이란 그것을 듣는 세상과 섞이려는 의지가 있을 때 비로서 고유의 힘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말은 어쩌면 그 사람 내면의 공간이다. 그 공간이 어떤 모습으로, 어떤 크기로 얼마나 세상에 열린 태도로 구축되어있는지에 따라 말의 질과 힘이 달라진다. 소통을 거부하는 근엄한 공간을 내면에 가진 사람에게 말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는, 가까이 가기에 부담스러운 화석 같은 건축일 뿐이다. 그럴듯한 장식으로 꾸미고 값비싼 가구를 가득 들여놓는다 해도 그런 공간은 삶을 대변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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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만 명 촛불이 광화문 광장에 켜졌을 때, 삭막한 대형 중앙분리대라는 비판을 받던 광화문 광장은 살아있는 말이 가득한, 세상에서 가장 큰 연설대가 되었다. 그것은 마치 킹스 스피치의 작은 방송실처럼 온전히 사람이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아름답고 엄숙한 공간이었다. 불가능한 상상을 해봤다. 만약 대통령이 광장의 말을 듣고 군중과 척을 지고 있는 고독한  궁궐을 나와 광장의 사람들 속에 섞여 자신의 ‘말’을 더듬더듬 한 마디라고 진심으로 건넬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누가 잘못했고 사건의 진위가 무엇인지는 결국 법이 밝힐 것이지만 거리로 나온 백만 명의 말에 답하는 말더듬이 왕의 어눌한 진심이 있었다면 우리는 그나마 덜 절망하고 진심의 부재에 대해 작게나마 희망을 품을 수 있지 않았을까. 

질문을 듣지 않는 말은 말이 아니다.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말이란 그것에 대한 나의 답변이다. 상대가 없는 말하기는 내 말에 아무도 귀기울여주지 않는 단순한 읽기에 불과하다. 때로는 말보다 공간이 더 명징한 메시지를 건넨다. 수많은 상대가 가득한 광화문 광장처럼, 조지 왕과 로그가 함께 했던 비좁은 방송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