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
(Rear Window.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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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창(Rear Window, 1954)> 

추억의 여배우 그레이스 켈리의 리즈 시절 모습을 볼 수 있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이창(Rear Window. 1954)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보고 싶어지는 영화다. 히치콕의 영화들은 특유의 세트 설치가 유명한데 이창에선 특히나 도심의 복잡한 아파트 하나를 옮겨온 것 같은 큰 규모의 현실감 있는 공간을 만들어 극의 긴장감과 사실감을 높였다. 스토리는 단순하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사진작가 제프리가 다리를 다쳐 자신의 아파트에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가 되고, 그는 매일 건너편 아파트 사람들의 일상을 훔쳐보기 시작한다. 

혼자 사는 노처녀의 애정행각, 무명 피아니스트의 따분한 일과, 젊은 여성 발레리나의 자유분방한 삶, 밤마다 발코니에 나와서 자는 이상한 가족의 풍경, 그리고 중년 부부의 심상치 않은 부부싸움…. 심심해서 시작한 관음증 놀이가 심각한 사건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영화의 재미다. 히치콕의 연출은 철저히 주인공의 시선과 영화를 보는 관객의 시선을 일치시키는데 집중하고 있다. 그 덕분에 시종일관 연극세트 같은 따분한 아파트를 비추는 카메라 앵글은 전혀 지겹지 않다. 앵글은 같아도 비슷한 장면에서 벌어지는 이웃들의 미세한 변화를 몰래 훔쳐보는 맛이 꽤나 쏠쏠하기 때문이다. 

제프리의 창을 통해 그와 함께 훔쳐보는 이웃들의 일상.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굳이 이걸 영화를 통해 얻을 필요가 있을까 싶다. 지금 창 뒤에 숨어 앞, 뒤에 있는 건너편 아파트 거실과 방을 들여다보면 더 리얼한 재미를 느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고백하자면 40년 가까이 아파트에 살아온 나 역시 여러 번 영화 속 제프리가 되어 관음증을 즐긴 적 있다. 심지어 망원경까지 들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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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창(Rear Window, 1954)> 

사실 여러 달째 단독주택을 지어보려고 땅을 알아보고 있다. 제프리 같은 인간이 우리 집을 훔쳐 보는게 두려워서는 아니지만 그런 시선은 시간이 지난다고 익숙해지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아파트라는 공간이 본질적으로 거주자의 심리상태와 사생활을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든다는 결론에 도달한 탓이다. 물론 건축가로 살면서 남이 지은 집에서 계속 사는 게 뭔가 아니다 싶기도 했고 층간소음 두려워 아이들에게 뛰지 말라고 소리치는 것도 이제 그만 해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괜찮은 땅 하나를 발견했다. 부모님과 두 딸, 나와 아내가 살아야 할 여섯 식구의 집이므로 모두 데리고 땅을 보러 갔다. 

스무개 필지가 쪼개져 있는 작은 단지인데 그중에서 내가 몇 주간 고민해서 고른 땅을 보여주자 식구들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아파트 지역에서 살짝 벗어난 저층건물 지역이고 남측과 서측은 그린벨트로 묶인 숲이 있었고 지하철역도 걸어서 15분 정도면 갈 수 있는 조용한 동네다. 왜들 반응이 저럴까. 비록 확 트인 전망과 넓직한 마당은 힘들지라도 주변에 숲도 있고 인적이 드물지도 않고 편의시설도 가깝고 작은 텃밭정도는 만들 수 있는, 이 정도면 우리 여건에는 꽤 좋은 땅일 텐데.   

땅을 보러가기 전, 실제 집을 지었을 때 느낌을 가족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기본설계를 해서 도면과 모형을 보여줬는데 그게 문제였다. 땅은 서측에 꽤 높은 나무가 빽빽한 숲이 바로 붙어 있었고(하지만 나는 여름의 서향과 겨울의 찬 서풍을 막아줄 수 있다고 생각했고) 남북으로 이웃 땅과 바로 접해 있었고(나는 도심과 가까운 단독주택지가 다 그렇지 뭐, 라고 생각했었고) 동측으로는 좁은 도로 건너 이웃 땅이 있어 사실상 사방이 이웃집과 높은 숲으로 막혀 있었다. 난 어차피 전원주택이 아니고 도시형단독주택을 원한 것이므로, 서측은 숲으로 동측은 집을 돌려세워서 이웃의 시선을 차단할 수 있을 걸로 생각했다. 하지만 가족들의 생각은 많이 달랐다. 단독주택에 살면서 이웃과 벽을 쌓는다는 것도 이상하고, 창을 내기 쉽지 않은 것도 문제고 빛을 받기 어려운 높은 숲도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서측에 숲이 있으니 이웃 시선 상관없이 큰 창으로 숲을 바라보자는 내 생각 역시, 나무들이 너무 크고 빽빽해서 음산한 기분이 들 거라는 초3 딸의 반론이 있었다. 

‘아빠, 욕조에 몸을 담그고 숲을 바라보는 낭만은 좋은데, 문제는 밤에 이 숲이 너무 무서울 거 같아. 이 땅으로 할 거면 내 방은 꼭 동쪽으로 창을 내줘.’   
나를 뺀 다섯 명은 다시 땅을 보러 갔고 한참 논의를 거듭했다. 그리고 땅 하나를 새로 골라주었다. 단지 초입 자리의 터로 작은 개울이 감싸고 돌아나가는 혹 부분에 놓인 가장 작은 땅. 주변 도로와 가깝고 편의점도 보이고 인근 상가건물 1층의 가구공방과 커피숍도 보이는 땅이다. 

도로 앞이라 소란스럽고 땅 모양도 찌그러져있어 처음부터 내 생각에선 배제된 땅이었다. 아니 왜 하필이면 이 땅을? 가족들의 생각은 다양했다. 풍수적으로 혈이 모이는 열린 땅(아, 그렇지. 풍수가 있었지)이라는 아버지의 의견, 스무개 땅 중에 가장 밝은 터(그 밝음을 어떻게 알 수 있으신지 잘 모르겠지만)라는 어머니의 의견, 숲 옆에 붙은 음산함 보다는 조금 사람 냄새나는 편이 좋다(아내가 전원주택을 싫어했던 이유)는 아내의 의견, 이 땅에 집 지으면 안 무서울 것 같다는(에이, 귀신은 없다니까) 딸의 의견. 

가족들의 생각을 존중하며 다시 고민 해보니 이전 땅 보다 기분 좋은 ‘창’을  낼 수 있는 터였고 더 밝은 집을 만들 수 있는 터였다. 동측 야산 쪽으로 열린 조망도 낼 수 있고 도로가 남측으로 난 동서로 긴 땅이라 모든 침실을 남향으로 배치할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주변과 격리되지 않으면서 이웃과 적당히 지지고 볶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땅이라고 할 수 있다. 각종 소음, 앞 동과 뒷 동의 시선에서 우리 집 거실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상황을 탈출하고자 집을 짓자면서 이런 선택이라니, 여전히 미심쩍긴 하지만 빛과 창, 이웃에 대한 생각이 나와 다른 가족들의 의견은 집짓기의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이 땅에서 모두가 원하는 집을 짓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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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창(Rear Window, 1954)> 

아파트를 벗어나자고 지어보려는 단독주택이 외부에 노출되는 창을 내기 싫어 식구들만 바라보는 작은 마당을 숨겨서 만들고 안쪽으로만 창을 내거나, 아니면 밖으로 아주 작은 창만 내는 경우를 많이 본다. 은신처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집, 불편한 이웃들을 완전히 차단할 수 있는 집. 서로간의 무관심에 익숙해진 아파트 피플들이 선택하는 단독주택들은 어쩐지 점점 더 폐쇄적인 경향으로 흐를지 모르겠다. 일차적으로는 살 수 있는 땅이 크지 않아서고 점점 각박해지는 시대 탓에 타인의 존재가 점점 부담스럽기 때문이겠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우리가 단독주택을 지으려는 이유가 아파트라는 공간이 우리에게 강요했던 불편한 사생활과 시선의 문제를 건강하게 열어 놓을 수 있는 작은 토대를 만들 수 있어서가 아닐까 곱씹게 된다. 

영화 이창에서 부인을 죽인 남자는 도심 속 섬처럼 존재하는 자신의 아파트를 이웃의 삶 따위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 사는 닫힌 공간으로 여겼다. 불만 끄면, 창문을 닫고 블라인드를 내리면 아무도 관심을 둘 리 없는 상자 같은 공간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여행을 못가 좀이 쑤신 사진작가의 관심 대상이 되고 말았다. 들여다 볼 수 있는 창이 너무 많아 오히려 주변 시선과 관심에 무감각해진 아파트 공간에 너무 익숙해진 탓이다. 

아파트에 살아도 불안하고 단독주택에 살아도 불안해서 창문 하나 쉽게 열지 못하는 우리의 집들을 생각해보면 조금 쓸쓸한 생각이 든다. 가족들 의견을 듣다보니 그래도 일단은 서로 적당히 지지고 볶으며 보이는 편이 좀 더 낫지 않을까 싶다. 아파트를 벗어나자면서 이웃과 단절된 집을 신나게 그리던 몇 주간의 나를 생각해보면 헛웃음이 난다. 바뀐 땅을 놓고 동측 창이 크게 열리는 식탁 놓을 자리와 침실에 빛을 들일 적절한 크기의 창을 그려보고 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와 내 가족의 삶이 이웃들의 창을 통해, 굳이 망원경을 쓰지 않더라도 기분 좋게 엿보이는 집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