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門)이야기
부산행 (Train To Busan, 2016)

영화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의 공간적 배경은 호수 위에 떠있는 작은 암자다. 실제 촬영 장소는 주왕산 자락의 주산지인데 현실의 호수엔 아무것도 없다. 존재하지 않지만 영화는 호수 위에 암자를 띄워 인생을 네 계절로 나누어 각기 다른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주인공이 암자로 돌아오는 장면마다 호수 어귀에서 배를 타고 물 위에 세워진 작은 일주문(一柱門)을 지나쳐 암자로 간다. 이때 문은 속세와 분리되는 부처의 영역을 상징한다. 

속세 삶의 끝, 부처의 삶의 시작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를 보여준다고 할까. 작은 문 아래를 지나치며 이전까지와 다른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고, 이전의 이야기는 끝난다. 우리 삶에서 문은 이처럼 어떤 사건의 시작과 끝이고 생각의 전환점이고 생사의 갈림길이며 행불행의 교차점이다. 주인공은 삶의 변곡점마다 문을 통과해서 현실에서 벗어난다. 

몇 해 전, 숭례문이 불타던 광경에서 우린 국보 1호라는 허울뿐인 건물의 전소가 아닌, 오랜 세월 시대와 호흡을 같이 하던 역사 하나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봤다. 충격적인 장면을 통해 우리가 배운 것 하나는 이전까지 잘 몰랐던 그 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찬찬히 사색해보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 문(門)이 단순히 건물로서의 실용적 목적 외에 누군가의 생각과 목적, 의지를 담고 있는 정신적 산물이었다는 걸 새삼스레 느끼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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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Door, 門)은 일차적으로 사람이 드나드는 출입구로 벽이나 담의 일부를 뚫어 만든 기능적 구조물이다. 공간적으로는 하나의 공간과 다른 공간이 만나는 경계부에 위치하여 이 공간과 저 공간, 이 장소와 저 장소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문(門)이라는 한자는 지게문 ‘호(戶)’자가 양쪽으로 붙은 모습을 묘사한 상형문자다. 불완전한 외짝 형태의 지게문이 쌍을 갖춰 문(門)이라고 부른 것인데 문은 출입을, 창은 채광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의미상으로는 서로 구별된다. 근본적으로 문이란 누구에게든 열려 있는 소통의 기호다.

건축물의 문은 일차적으로 사람이 드나들면서 내 외부의 공간이 제 역할을 하기 위한 필수적 요소다. ‘문과 창을 통해 방을 만드나 안이 비어있어 방으로서 유용하다’는 노자의 도덕경 문구는 문이 각기 다른 공간과 공간을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로 기능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한편 문은 ‘Shelter(은신처)’로써 출발한 건축 역사에서 외부 침입자와 각종 위험에서 안전과 방어를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다. 

바깥과 맞닿아있는 문은 외부의 예측 불가능한 위험 요소가 침입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다. 문은 그래서 우선적으로 침입에 대비한 튼튼한 벽이 되어야 했고 극한기후와 야생 환경, 강한 적으로부터 생명을 지켜주는 확실한 보호막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가끔은 어느 누구의 출입도 허용하지 않는 단절과 거부의 언어로 활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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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과 탈출구, 새로운 삶의 의지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영화 <부산행>의 문(門)은 흥미로운 소재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는 좀비가 부산행 KTX에 타자 열차 안은 아수라장이 된다. 나아가느냐, 물러서느냐의 두 가지 방향 밖에 주어지지 않는 열차 공간에서 사람들은 일단 전진한다. 전진 본능은 아마도 성공과 실패, 발전과 퇴보 두 가지만 요구하는 각박한 사회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당연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망설인다. 객차와 객차 사이에 문을 두어 연결한 공간 앞에서 생존자들은 홀로 떨어진 가족을 구하기 위해 좀비들을 떼어놓고 안전한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위험을 각오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우리를 진짜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좀비가 아니라 사람이다.

생존 그 자체가 모든 명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좀비와 사람을 동일시한다. 혼자 살려는 사람에겐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가 좀비다. 문을 열고 다른 이를 구하려다가 내가 죽는다는 공포가 좀비에게 물리는 공포보다 훨씬 세다. 영화 속에서 열차 공간이 우리가 사는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은 새삼스러운 자각이 아니다. 영화 <부산행>의 클라이막스는 할머니가 좀비를 가로막았던 문을 열어주는 장면이다. 혼자 살겠다고 다른 이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인간군상에 절망한 할머니가 걸어 잠군 문을 열자 어쩔 수 없이 좀비가 된 사람들과 스스로 좀비가 되어버린 사람들이 한 공간속에 합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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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좋다. 이게 뭐야. 이럴 거면 왜 그리 착하게 살았어?”
“자기 위할 줄 모르고 남한테만 퍼주더니, 왜 그리 고생만 하며 살았어?”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단평처럼 우리를 공포스럽게 만드는 건 ‘열어주지 않는 문’이다. 누구든 드나들게 만들어놓은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그는 사람들이 진짜 공포다. 사실 놀랄 일은 아니다. 각자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나만 드나들 수 있는 문을 몰래 만들거나 아무나 못 들어오게 슬며시 자물쇠를 이중 삼중으로 채우곤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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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며 우리 사회의 다양한 문들을 생각해봤다. 사람이 있어 우리 삶의 모든 문은 의미를 갖는다. 문에 내재된 정신적 가치, 설명하기 어려운 이 시대를 향한 풍자와 은유는 문의 크기와 용처에 상관없이 읽어내기가 간단치는 않을 것이다. 우리 곁엔 지금도 많은 문이 있고 우리는 매일 그것을 통과하며 살고 있다. 열린 문, 닫힌 문, 근엄한 문, 호의적인 문, 불친절한 문, 벽이나 담 같은 문, 열쇠로 굳게 잠긴 문, 나쁜 문, 좋은 문, 착한 문, 침묵하는 문…, 그리고 내가 지금 잠그려고 하는 문. 문 너머에 우리를 기다리는 시간, 우리가 바라는 희망이 숨어있다.

담양 소쇄원(瀟灑園)의 오곡문은 토벽으로 만든 담장 일부를 자연스럽게 터놓음으로써 계곡에서 흐르는 물길을 열고 사람도 드나들게 했다. 방어와 안전이라는 문의 일반적 역할을 따지기보단 집이 들어선 자연환경에 어울리도록 문이 갖추어할 태도에 더 의미를 둔 경우다. 

굳게 닫힌 문이 점점 늘어나는 환경 속에서 우리는 굳이 닫지 않아도 될 문을 벽처럼 보이기 위해 애쓰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보다 나은 도시의 삶을 위해 건축, 길, 열차 그 어딘가에 존재하는 수많은 문들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열린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먹고살기 위해 닫아버린 마음의 문도 주변 사람들을 향해 조금씩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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