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
Medianeras, 2011


건축은 단순히 추위나 어둠 같은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기능만 중요하지 않다. 잘 느끼진 못하지만 건축은 사실 우리 삶 전체를 장악하는 중요한 물리적 조건이다. 우리가 사는 집의 공간, 구조, 창밖의 풍경, 빛, 면적과 외부의 형태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한다. 태어나서 지금껏 아파트에서만 살아온 딸은 아파트 측벽에 왜 창이 없는지 늘 궁금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 (1).jpg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일부는 돈과 관련되어있고 일부는 법과 관련되어있는 피치 못할 이유다. 하지만 아이가 이해하긴 어려운 내용이라 대충 때울 요량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남쪽만 좋아해서 그래”라고 답을 한다. 그러면 딸은 이렇게 묻는다. “저 아파트는 동향이고 측벽이 남향인데 창이 없잖아?”라고. 난 잠시 주저하다가 이렇게 말을 받는다. “그건 우리나라 사람들이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는데, 옆보다 앞을 좋아해서 그래”라고. 답변이 이상하다는 건 나도 잘 아는 터라 아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툴툴거리고 만다. “그런데 앞과 옆은 뭘 보고 구분하는 건데? 넓은 면이 앞이고 좁은 면이 옆인 건가?” 이쯤 되면 대화는 늘 이렇게 마무리 된다. “너에겐 조금 어려운 얘기라 나중에 크면 얘기해줄게.”

아파트 측벽에 창을 내지 않는 이유는 채광창을 냈을 때 대지경계선이나 창을 마주보는 건물로부터 건물을 이격해야 하는 거리가 법으로 규정되어있기 때문이다. 창을 내지 않는다면 건물과 건물, 건물과 대지경계선은 약간의 이격거리만으로도 건물을 지을 수 있지만 창을 낸다면 상당히 큰 이격거리를 떼어서 건물을 지어야 한다. 

이 문제는 결국 한정된 땅 안에 얼마나 많은 세대가 들어가는 건물을 짓느냐의 문제고, 여러 동으로 구성된 단지형 아파트인 경우엔 몇 동까지 만들 수 있고 얼마나 많은 세대수를 넣을 수 있는지의 문제가 된다. 말하자면 최대의 수익성을 만들려는 돈의 논리와 최소한의 쾌적한 생활권을 확보해주려는 법의 논리가 부딪히는 접점에서 측벽에 창이 없는 건물이 만들어진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앞뒤가 안 맞는 말이라 딸이 이 사실을 이해한다면 “창 없이 쾌적하게 산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이야?”라고 어이없어 하겠지만.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 (4).jpg

도심 한복판에 옆 건물과 다닥다닥 붙게 지은 커다란 오피스텔이나 주상복합 아파트의 경우를 생각해본다면 차라리 창을 내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측벽이 거의 달라붙은 두 건물 사이에 창이 있다면 창 안에 사람들은 별로 행복하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항상 커튼을 치거나 블라인드를 내려둔 채 살더라도 그런 창이라도 있는 게 나은 건물이 도시에는 많다. 

영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의 원제목은 <측벽(Medianeras, 2011)>이다. 우리말 제목과 원제목의 차이가 너무 커서 제목만으로는 대체 어떤 내용의 영화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다. 영화는 건물 측벽을 이웃한 두개의 아파트 건물 작은 원룸에 사는 남자 마틴과 여자 마리아가 삭막한(발코니에 방치된 개가 투신자살을 할 정도의) 대도시 부에노스아레스에서 고독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다 결국 연인으로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다. 그들이 사는 집은 최대한 많은 세대를 넣어 만든 작은 아파트다. 햇빛 한줄기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어둡고 좁은 집들의 집합체다. 

웹디자이너인 마틴은 외출도 거의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좁은 집에 박혀 생활한다. 낮과 밤의 의미가 없는 공간 안에서 그는 늘 새벽 2시에 잠이 들고 2시 50분에 잠이 깨는 불면의 나날을 보낸다. 그는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 한편 옆 건물 마리아는 건축가다. 하지만 어떤 집도 짓지 않은 채 매장의 쇼 윈도우 장식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간다. 옛 애인을 잊지 못하는 그녀의 대화상대는 마네킹이다. 그녀는 고소공포증을 앓고 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 (5).jpg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도시 풍경을 다큐멘터리처럼 편집한 초반 인트로 부분이다. 달달한 우리말 제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도시 풍경과 두 주인공의 나레이션이 5분 넘게 계속된다. 마틴이 읊조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실상은 한마디로 비인간화된 회색도시다. 마틴은 말한다. “다른 기성품처럼 사람의 등급을 나누기위해 집이 만들어진다. 

전망 좋은 집과 나쁜 집, 고층과 저층, 빛이 드는 집과 안 드는 집. 확신하건데 별거와 이혼, 가정폭력, TV채널홍수, 대화단절, 무기력, 무관심, 우울증, 자살, 노이로제, 공황발작, 불안, 스트레스…, 이 모든 것이 건축가 때문이다”라고. 건축설계하는 입장에서 보면 다소 충격적이다. 하지만 같은 의미로 보자면 이 모든 것은 건축주 탓이기도 하다. 어떤 건물을 만들고 싶은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건물들이 계속 지어지는 것이고 결국엔 지금의 도시가 되고 만 것이다. 도시란 언제나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욕망하는 건물들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창 없는 측벽 아파트로 가득 찬 우리의 도시처럼 말이다.

하염없이 포장용 뽁뽁이를 터트리다가 데이트도 하고 섹스도 하고 윌리를 찾고 컴퓨터 게임을 하며, 각자의 삶을 살던 두 사람은 어느 날 각자의 좁은 집 벽을 망치로 뚫어(불법 공사에다가 망치로 뚫릴만한 벽인지 의심은 되지만) 창을 낸다. 그러자 무심하게 등을 돌리고 서있던 두 건물의 측벽에 해가 들고 밖이 보이는 작은 창문이 하나씩 만들어진다. 두 사람은 창을 열고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다. 희박한 확률이긴 하지만 어쨌든 새로운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 (6).jpg

창을 내기 전까지 마리아는 측벽(Medianeras)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왔다. ‘모든 건물에는 쓸모도 이유도 없는 부분이 있다. 정면도 후면도 아닌 측벽이다. 우릴 경계 짓고 먼지만 먹는 공간. 우리의 나쁜 속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변덕, 균열, 임기응변, 카페트 밑에 쓸어넣는 먼지 같은 것들….’ 창을 뚫고 마리아가 말한다. “측벽에 난 작고 불규칙하고 무책임한 창문이 칠흑 같은 삶에 한줄기 빛을 비춘다. 인생에서 거저 얻어지는 변화는 없다. 결단과 감행이 일상을 바꾸고 인생을 변화시키는 힘을 만드는 것이다.”

빠른 속도와 효율이 지배하는 도시에서 우리는 옆을 볼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한 채 살아간다. 가장 자신 있는 면(面)만 보여줄 수 있는 각종 SNS와 실시간 메신저로 오가는 가상 네트워크의 친구들 면면이 다양하고 풍부해질수록 우리는 점점 더 외롭고 고독해진다. 세심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옆면과 그늘진 뒷모습, 숨기기 바쁜 나와 당신의 진짜 모습이 감춰진 관계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진심을 전달하기 어렵다.

삭막한 환경에서도 누군가는 나무를 심고, 창을 뚫고, 서로를 바라본다. 마리아는 망치로 때려 창을 뚫기 전 그림책 <윌리를 찾아라>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누굴 찾는지 알아도 찾지 못하는데 누굴 찾는지 모르면 어떻게 찾나?’ 딸에게 들려줄 제대로 된 답변에 대해 고민 하다가 나도 이런 생각을 해봤다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알아도 잘 살기 어려울 텐데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잘 모르면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 도시의 건물 측벽에 변변한 창 하나가 없는 이유는 돈의 문제도, 법의 문제도 아닐지 모른다. 

진짜 이유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고민 해본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모르니 어떤 집을 원하는지 모른 채 누군가 정해준 집에서 살며 다 같이 앞면만 바라보고 옆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버려진 옆면에 창을 내자. 창을 내면 그때야 비로소 잊고 있던 뭔가 중요한 진실을 알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