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Cart, 2014)

가야할 이유가 딱히 없어도 그냥 가는 데가 마트라곤 하지만 주말에도 마트, 생일에도 마트, 크리스마스에도 마트를 가는 생활 패턴은 뭔가 심란한 느낌을 들게 한다. 가서 쉬엄쉬엄 산책하며 시식 코너나 돌다 오면 다행인데 생각도 없던 물건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오는 것이 늘 문제다. 

일단 사놓으면 다 쓰고 먹게 되어 있지요, 라는 생각이겠지만 글쎄 꼭 그럴 필요가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20세기 이후 자본주의는 사람들의 삶을 재편하며 생활 패턴을 바꿔놓았다. 가장 큰 변화는 엄격한 ‘출퇴근 시간’이 생긴 것이다. 사람들의 하루는 결국 일하는 시간, 일하지 않는 시간으로 분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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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카트(Cart, 2014)>

일하는 시간은 생산하는 시간이고 일하지 않는 시간은 소비하는 시간이다. 결국 생산하거나 소비하거나, 둘 중 하나를 해야만 하는 시스템 속에서 우리는 벗어나기 어렵게 되었다. 뭔가를 사기 위해 일을 하고 일이 끝나면 번 돈으로 물건을 사러간다. 처음과 끝이 맞닿아 있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우리는 생산과 소비가 이어진 트랙을 끊임없이 오간다. 대형화된 할인 마트는 그 트랙 언저리에 있다. 차고 넘칠 만큼의 물건이 쌓여있는 마트가 생산과 소비를 이어주는 일종의 매개공간인 셈이다. 이쯤 되면 마트는 우리의 삶에서 꽤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공간처럼 보인다. 

생산과 소비 사이에서 잠시 길을 잃고 주저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불안의 공백을 깔끔하게 메꾸고 있으니 말이다. 할 일 없이 빈둥거리지 말고 차라리 빈 카트를 끌며 뭔가를 하라는 것이다. 카트를 끌다보면 하다못해 운동이라도 될 테니.  

파스칼은 말했다. ‘인간의 불행은 방 안에 가만히 있지 못하는데서 시작한다’고. 방 안에 있지 못하니 나가야 하고, 뭐든 해야 하고, 그러다보니 돈을 쓰는 것이다. 그러니 심심해서 마트에 가는 현상(심심한데 마트나 갈까, 라고 파스칼이 말한 적은 없지만)은 마트 잘못은 아니다. 인간이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탓이다. 마트에 들어오면 뭔가를 사기 위해 시간을  보내는 건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물건을 사는 건지 헷갈린다. 헷갈리게 해서 뭔가를 자꾸 사게 만드는 건 아닐까 의심을 해보긴 하지만. 암튼 밝고 높고 넓은 공간에서 카트를 끌고 다니며 이것저것 마구 담다 보면 일하는 시간동안 구겨져있던 자존감이 살짝 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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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카트(Cart, 2014)>

업무시간동안 생산자로서 힘겨운 우리는 스스로를 위로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소비자가 되는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대형 할인 마트는 바로 이 지점에서 불안해서 방안에 가만히 있지 못하는 우리에게 푼돈을 쓰는 만족감을 제공하고 고객으로서의 지위에 집중할 수 있는 안정된 시간을 선물한다. 아울러 다른 이들 역시 나와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회적 연대감까지 부록으로 끼워준다.

터 벤야민(Walter Benjamin) 선생이 말하지 않았던가. “소비는 사람을 한 무리로 느끼게 만든다”고. 선생님 말처럼 우리는 물건이 쌓여있는 마트에서 힘들었던 바깥의 일상을 잊는다. 그리고 무슨 영문인지 ‘나 정도면 먹고 살만하다’라는 기특한 자부심과 먹고 살 돈을 갖고 있다는 애매한 안도감을 느낀다. 덤으로 복잡한 매장 구석구석 카트를 자유자재로 운전하는 운동력과 판단력을 갖춘 내 몸에 대한 소소한 긍지까지. 하지만 마트는 도시라는 무지막지한 시스템 속 작은 부품으로서의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군중속의 고독, 혹은 풍요 속의 빈곤 같은 모호하고 싸한 감정들이 들락거리는 가볍지만은 않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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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카트(Cart, 2014)>

영화 <카트>의 공간적 배경인 대형 마트는 개인의 고독과 불안을 잘 보여준다. ‘마트’라는 공간을 거울삼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이야기한다. 고객을 위한 넓고 깨끗한 매장, 그와 대비되는 어둡고 삭막한 비정규직들의 하역 공간. 마트의 후방공간은 하역과 이동을 위해 기능하는 물건의 영역이다. 여기서 ‘일하는’ 사람은 큰 공장의 부속품이 된다. 오로지 가성비와 내구성으로 가치를 평가 받는다. 

마트는 주차장에 대기하는 줄 잘 맞춰진 자동차처럼 많은 물건들 매대에 보기좋게 진열해놓고 우리를 그 사이 공간(카트 두 개가 간신히 교차통행 가능한 치수의 통로)을 힘겹게 오가며 물건의 풍경과 하나가 되기를 원한다. 물건이 사람 같고 사람이 물건 같은 풍경이랄까. 마트는 자동차와 카트, 사람과 물건을 공간 안에서 평등하게(?) 만든다. 

벤야민 선생께서는 일찍이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인간의 고독, 욕망, 소비의 본질을 따져보실 요량으로 소요(逍遙)라는 산책 행위를 즐기셨다. 그런 의미로 보면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도 결국 마트 안에서 소요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카트에 담긴 물건과 비례하는 소요의 한심함이 꼭 계산대 앞에서만 자각된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그나마 이런 식으로라도 자아성찰 가능한 공간을 찾다보면 또 마트만한 데도 없는 듯 싶다. 

마트는 오로지 대형 소비(Mass Consumption)를 위한 구축된 단순 간결한 공간이고, 마트에서 모든 사람은 카트 앞에서 평등하다. 같은 음식을 먹고, 비슷한 옷을 입고, 남이 산 물건을 따라 사는 시대에 마트는 우리의 삶을 더욱 쉽고 단순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어제도 마트에 갔다. 

“아빠, 심심한데 마트나 갈까”라고 나를 꼬신 열 살짜리 딸과 함께. 어제도 마트는 여지없이 나를 얼빠진 상태로 산책하는 철학자로 만들어준다. 그리고 계산대 앞에서 여지없이 소비와 소요를 반성하는 시간을 제공해주었다. 돈 쓴 만큼 뭐든 돌려주는 공간이 ‘마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쓸수록 절약하고 있다는 이상한 뿌듯함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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