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Against the Wall
Vand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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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피티’라는 단어 조차 생소했던 시절인 1990년대 중반부터 그래피티 작업을 시작한 ‘한국 그래피티 1세대 아티스트’ 반달. 이후 그의 행보에 ‘최초’와 ‘처음’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건 당연한 일이 되었다. 1998년 한국 최초로 그래피티 개인 사이트를 개설했고, 미국 그래피티 포털 ‘Artcrime’에 최초로 한국인 그래피티 작가로서 이름을 등록했다. 한국에서 최초로 ‘그래피티 스쿨’을 개설해 많은 이들에게 그래피티를 알리고 가르쳤으며, ‘Vandal’s Art Factory(VAF, 바프)‘를 설립해 후배들을 발굴하고 끌어안았다. 이후 7년간의 중국 생활을 뒤로 하고 다시 밟은 한국 땅에서 원 없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그래피티 아티스트 반달을 만났다. 20여 년 가까이 그림을 그리며 살아온 그의 삶은 <데미안>에서 알을 깨고 나오려는 새와 같았다.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고, 신을 향해 달려가는 아프락사스처럼 그는 끝없이 자신의 세계를 파괴하고 진짜 자유를 찾고 있었다.

 

# <이태원 스트리트 키드>


형은 유년시절부터 지금까지 쭉 이태원에서 지냈어요? 이태원에서 나고 자랐어. 이북에서 아버지와 함께 내려온 할아버지가 자리를 잡은 곳이 지금 해방촌이라 불리는 미8군 근처였지. 당시 이태원 부근에 이북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었거든. ‘태(態)가 다르다(異)’ 해서 지명이 이태원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타지 사람들이 유난히 많이 모여 사는 동네였지. 목수 일을 하는 할아버지가 수공예 침대 공장을 하셨는데, 나무를 직접 깎아서 팽이도 만들어 주곤 하셨어. 어린 마음에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도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했던 것 같애.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

 

이태원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어땠어요? 당시 우리나라 안에서 뭔가 신기하고 새로운 건 모두 다 이태원에서 시작됐어. 새로운 건 우리 동네에서 나온다는 자부심 같은 게 있었을 만큼. (웃음) 그중에서도 이태원의 클럽가는 어린 나이인 나에겐 금지된 구역이었지. 중학교 때 친구들 중 ‘잘 논다’ 싶은 애들은 모두 그 동네로 가는 거야. 하지만 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 때문에 항상 “저런 곳엔 가면 안 돼” 하는 말만 들었어. 그래서 그런지 그때는 금지된 것에 대한 호기심이나 동경을 항상 갖고 있었지.


그 호기심이 발동한 게 언제에요? 한창 반항하는 사춘기 시절에 친구들이 집을 나가면 이태원 클럽가에서 일을 하더라구. 과감히 학교 때려치우고 돈 벌면서 자기 멋대로 사는 친구들에 대한 막연한 동경 같은 게 있었지. 나는 그냥 학교 다니고 공부를 하고 있었지만. 그러다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여러 가지 집안 문제가 생기면서 고민이 많아지기 시작했어. 게다가 내가 열세 살 되던 해엔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셨지. 그때부터 그 막연한 동경이라는 걸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어. 어린 마음에 ‘내가 집안의 가장이니 공부를 해서 집안을 일으켜야겠다’고 결심한 거지. 그러니까 중학교 때부터 성적이 점점 오르기 시작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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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미술에 대한 재능을 발견하지 못했나요? 나도 모르게 갖고 있던 미술적인 재능이 분명 있었던 것 같애. 내가 대충 그린 그림을 보고도 사람들은 잘 그렸다고 칭찬을 했으니까. 시간을 따로 투자하지 않고, 학교 미술 시간에 그린 그림으로 상도 많이 받고, 칭찬도 듣고. 그런데 그런 내 재능을 한편으론 끊임없이 억눌러야 했던 거지. 그림은 내가 갖고 있는 재능일 뿐, 이걸 통해 뭘 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안했던 것 같애. 미술 공부를 진지하게 권하는 고등학교 선생님 권유에도 ‘나는 공부만 하겠다’ 했으니까. 공부를 해서 홀어머니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반대로는 내 맘대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고 싶은, 이중적이고 상반된 감정 사이에서, 내가 동경하는 것들과 현실에서 내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들 사이에서 나는 항상 갈등했지. 그렇게 내가 가진 미적인 느낌을 억누르다 고등학교 2학년 때쯤, 도서관에서 우연히 건축 잡지 한 권을 봤어. 머리가 찢어지는 느낌이 들더라구. 이건 어머니가 늘 말씀하시던 “그림 그리면 먹고 살기 힘들어”도 아닌 것 같고, 예술적인 무언가도 들어가 있는 것 같고. 양쪽으로 갈라져 있던 내 자아를 하나로 합쳐지게 할 수 있는 타당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 돈도 벌면서 예술적인 재능도 발휘할 수 있는, 내가 갈등하는 두 부분을 하나로 절충할 수 있는 분야를 발견했다는 생각이 들었지. 건축 공부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해서 문과였던 2학년 2학기 말에 이과로 전과를 하면서까지 건축 공부를 하려고 대입을 준비했어.

 

# <그림을 만난 순간>


대학 생활은 재미있었나요? 학교에서 집이 별로 멀지도 않았는데, 공부에 방해된다는 핑계로 학교 근처에서 자취 생활을 시작했지. 기독교 분위기의 집안과 기존에 나를 억누르고 있던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난 거야. (웃음) 처음으로 ‘아, 이게 자유구나’ 느끼면서 신나게 술 마시고 놀았지. 맨날 술 먹고 애들이랑 얘기하다 보면 이상하게 쓸데없는 얘기를 해도 생각이 깨어있는 것 같았어. 술에 점점 취해가지만 영혼은 점점 깨어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웃음) 1년에 술 안 마신 날이 3일 정도 됐나? (웃음)

 

건축 공부는요? 2학년 때 전공 수업이 시작되면서 설계 부분에서 꽤 잘 했던 것 같애. 학생 100명에게 같은 면적의 대지를 주고, 각자 어떤 컨셉으로 건물을 지을 것인가? 하는 물음에 모두 다른 100개의 디자인이 나온다는 건 참 매력적인 거거든. 사람 생각이 다 다른 거니까. 설계 자체에 상당히 재미를 느끼면서 공부했지. 그러다 3학년이 끝날 즈음, 건축 공부를 계속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하는 고민이 시작됐어. 내 작업물들을 보고 전공과목 교수님들의 크리틱 반응이 대체적으로 두 가지로 나뉘어졌어.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 vs 아트적인 성향도 좋다. 건축은 그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거잖아. 타인을 위한 배려가 들어가야 하는 거지. 예술의 형태를 가지고는 있지만 이타적인 형태의 예술이 바로 건축이었던 거지. 나에겐 맞지 않는 방법이었어. 나는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컨셉의 건축물에 들어가서 살 수 있겠는데, 이걸 타인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거야. 그래서 고민 끝에 결국 대학을 나왔어.

 

그림이 자퇴의 이유에 속하기도 했나요? 나는 건축을 통해 이질화되어있는 여러 자아들을 하나로 응축시킬 수 있는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까 그것들을 완벽하게 조화시킬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 거야. 사실 그 다음 대안은 없었어. 다만 이젠 나 자신에게 솔직해져야겠다는 마음은 먹었지. 그리고 군 생활 하면서 그 다음을 생각해보자는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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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그림에 마음을 굳히게 된 건가요? 학교고 뭐고 다 놓아버린 상황에서 마음 놓고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 그러다 자연스럽게 이태원 우리 동네 군데군데 스프레이로 그려진 낙서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 자신의 이름이나 가명을 쓰고 다니는, 지금 ‘태깅(Tagging)’이라고 부르는 거였는데, 그땐 그걸 뭐라고 부르는지도 몰랐지. 미국인인 매형한테 물었어. 저렇게 스프레이로 낙서한 걸 뭐라고 부르냐. 그랬더니 ‘그래피티’래. 아, 저걸 부르는 단어가 있구나. 그때부터 매형을 통해 그래피티에 관한 정보들을 많이 얻었지. 1990년대 중반, 당시엔 인터넷도 활발하지 않았으니까. 검색 사이트라곤 ‘야후(Yahoo)’밖에 없던 시절이었는데, 그래피티를 검색하니 엄청나게 많은 것들이 있더라고. 이태원 담벼락에 그려진 낙서들만 봤지, 이렇게 예술적인 형태로 완성도 있게 그려진 그래피티 작품을 제대로 본 게 그때가 처음이야. 건축을 봤을 때 머리가 찢어졌던 느낌보다 더 강렬한 느낌이었어. 건축은 내 나름대로의 현실에서 이성적인 판단과 계산이 어느 정도 들어간 합의점이었지만, 그래피티는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어. “우와! 이런 게 어떻게 표현이 가능해?” 하는 의구심 하나로 그날 밤 곧장 스프레이를 몇 통 사서 집에 오는 길에 ‘치익’ 뿌려봤지. 이름도 쓰기 힘들더라고. 스프레이로 이런 그림이 가당키나 한건가? 하는 생각을 했어. 충격이었지. 그 충격 안에서도 ‘나도 저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 생각만으로도 너무 신이 났지. 자꾸 내 안에 있는 뭔가가 ‘당장 해봐라, 당장!’ 말하는 거 같았어. 그때가 1994년, 1995년 즈음이야.

 

앞으로 그래피티를 계속 해야겠다는 결심 같은 게 있었어요? 내가 그래피티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모든 걸 합리적인 기준으로 결정하려고 애쓰는 타입이었던 거지. 그래피티를 만났을 땐, 사실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 순간 다 빠져들어 버려서 계산이고 합리적인 판단이고 뭐고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어. 스프레이를 다루는 게 서툴러서 줄줄 흘러내려도 그냥 그게 너무 좋았던 거야. ‘빠져들었다’는 그 느낌 이후 10년 내내 그게 재밌어서 시간을 송두리째 쏟아 붓게 된 거지. 계획 같은 거 없이 그저 내가 좋아하는 걸 하다 보니, 너무 자연스럽게 그게 내 삶이 되어버린 거지, 내가 어떤 삶을 만들겠다고 생각을 하거나 결심을 했던 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