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n, Moon
할렘 블루스

 

“내 작업의 밑천은 어린 시절 다녔던 미술학원 경험이 1할, 용돈만 생기면 징그럽게 사 모았던 흑인음악앨범 커버에서 얻은 영감이 9할이에요.” 손문은 그 밑천들을 가공해 임팩트 강한 작품으로 탄생시키는 작가다. 아프로-아메리칸(Afro-American) 문화에 무한한 애정을 품고 있는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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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로-아메리칸 문화에는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됐어요? 처음 접한 건 80년대 후반 AFKN을 통해서였어요. 제 또래의 빌보드 키드들이 그렇듯이요. <Showtime At The Apollo>, <Soul Train>, <America’s Top 10>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났죠.

 

용돈만 있으면 흑인음악 앨범을 샀다고 했잖아요. 지금 소장하고 있는 앨범이 꽤 되겠어요. 그렇게 자랑할 만한 수준은 못 되고요. CD와 LP합쳐서 2,000장이 조금 넘는 것 같아요.

 

특히 아끼는 앨범은 뭐예요? 가스펠 그룹 커미션드(Commissioned)의 앨범 <Time & Seasons>이 먼저 떠오르네요. 이 앨범이 대단한 명반이거나 희귀해서가 아니라요. 제가 뉴욕 할렘에 정착한 후 처음으로 구매한 앨범이어서요. 할렘의 125가 철교 아래에 있던 ‘Harlem Music’이라는 레코드숍에서 구매했었는데요. 가게 안에 있는 모든 음반들이 전부 흑인음악이어서 다리가 풀릴 정도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할렘에서 산 적이 있었어요? 어떤 계기로요? 처음부터 할렘에서 지내려던 생각은 아니었어요. 할렘의 집세가 저렴하니까 잠시 머물며 다른 집을 알아보자는 계획이었죠. 그런데 그만 동네에 정이 들어버려서, 그냥 눌러 앉았어요. 1년 정도 거기서 살았구요.

 

무섭지는 않았어요? 왜 안 무서웠겠어요. 동양인은 물론이고 백인 한 명 안 보이는 동네인데요. 적응하기 전까지는 정말 긴장의 연속이었어요. 동네를 돌아다닐 때마다 수십 개의 시선이 따라 다니는데, 처음엔 객지에서 뭔 일 당하는 거 아닌가 싶어 식은땀이 다 나더라구요. 그런데 두 달 정도 열심히 얼굴 비추며 인사하고 다니니 조금씩 인정을 해줬어요. 서로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사실 큰 덩치와 곱지 않은 외모 덕도 많이 보긴 했어요. (웃음)

 

그곳에서 친구는 많이 사귀셨어요? 네. 떠날 때까지 동네 사람들과 정말 잘 지냈어요. 뉴욕 같은 대도시에서는 수년 이상을 살아도 이방인 같은 느낌이 강하고 그 후드나 로컬 커뮤니티에 속하는 기분을 느낄 수 없죠. 그에 반해, 할렘은 외부에서 보면 매우 폐쇄적이지만 내부적으로는 굉장히 내밀하게 연결된 커뮤니티거든요. 어찌됐든 일단 그 안으로 발을 들이기만 하면 이웃으로 인정을 해줘요.

 

어떻게 해서 친해지게 됐어요? 계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 동네 이발소에 다니면서부터였어요. 블랙 커뮤니티에서 이발소는 단지 이발하고 면도하는 장소가 아니에요. 동네의 모든 남자들을 이어주는 중요하고 상징적인 장소죠. 할렘에 자리 잡고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큰맘 먹고 이발소를 찾았어요. 물론 무서워서, 함께 사는 친구를 데리고 갔죠. 함께 안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이발소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모두 저희를 쳐다보는데, 정말 시간이 멈춘 것 같았어요. ‘아, 역시 내가 오면 안 되는 곳이구나’라는 생각이 스치더라구요. 봉변당하기 전에 어서 나가야겠구나 싶었는데, 안쪽에서 어떤 덩치 큰 형님이 날 불렀어요. 이리 와서 앉으라고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발을 하는데, 짧게 잘라달라고 하니 딱 동네 흑인처럼 만들어 놨더라구요. (웃음) 그분이 사장님이었어요. 이발사 생활 30년 동안 동양인은 처음이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렇게 이발소를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동네 사람들 얼굴도 익히고 친해지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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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렘에서의 시간이 스스로의 작업에 끼친 영향은 뭔가요? 할렘에서의 시간들은 저에게 아프로-아메리칸 문화의 본질적인 의미를 사유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어요. 저에겐 성지순례 같은 거였죠. 오늘날의 아프로-아메리칸 문화가 풍성하게 꽃을 피운 ‘할렘 르네상스’의 본거지니까요,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와 말콤 엑스(Malcolm X)의 위대한 발걸음이 시작된 곳, 소년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이 큰 꿈을 키우던 곳이 바로 할렘이잖아요.

 

아프로-아메리칸 문화의 매력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해요? 글쎄요. 흑인이 아닌 제가 그 맛과 멋을 어떻게 전부 이해할 수 있을까요. 다만 20년이 넘도록 제 취향과 감성을 온전히 사로잡고 있는 이 문화의 매력은, 그냥 그 자체로의 완전성이 아닐까 싶어요. 다듬어지지 않은 그 상태로도 온전히 충만한, ‘자연’같은.

 

아프로-아메리칸 문화를 제대로 느껴보길 원하는 이에게 조언을 한다면? 제가 감히 할만한 조언은 없을 것 같은데요. 다만, 어떤 문화를 그냥 단순히 트렌드로만 받아들이면 한 시즌 유행하는 패션처럼 어느 순간엔가 소비되어 사라지는 것 같아요. 그 문화의 히스토리를 함께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