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an Independent State
나는 독립국이다_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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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바이벌, 나는 누구인가
<1박 2일>의 복불복 서바이벌은 그냥 웃고 즐기기 위한 장난거리였다. 편히 잘 수 있는가,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있는가의 문제.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원초적 주제란 점에서 공감은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복불복 서바이벌엔 냉정한 현실의 무게도 있었다. 잠자리와 먹거리는 실상 얼마나 절박한가. 한번 웃고 말자는 설정이더라도 제대로 먹고 제대로 자고 싶어 탈락을 면해보려는 출연자들의 간절함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서바이벌이 대세다. ‘생존경쟁’이란 말만 들어도 피곤할 지경인데, 생존과 경쟁을 내세워 감동과 즐거움을 주는 오락거리로 재구성한다. 자칫 현실의 재탕이 되어 불편해질 수도 있는 위험성도 있다. 당연히 평등, 공정의 원칙으로 커버해 간다. 어차피 1명을 빼곤 모두 탈락하는 게임이다. 회를 거듭할수록 죽지 않는 게 목적이 된다. 현실의 고단함을 가벼운 유머로 위로해주던 복불복과는 지향점이 다르다. 구경꾼에겐 판관의 자격이 주어진다. 현실에선 불가능한 정의사회 구현을 나름의 잣대로 직접 판정해보는 짜릿한 경험이 된다. 그러자 답 안 나오던 후진 스팩의 찌질한 루저들이 하나 둘 승자로 거듭났다. 구경꾼들은 기꺼이 정의의 사도가 되어 이들을 보호하고 추대해 주었다. 실력도 중요했지만 사연은 더 중요했다. 불우하고 보잘 것 없을수록 파장은 커졌다. 어쩌면 예정된 일이었을지 모른다. 수많은 구경꾼들 자신이 늘 탈락의 공포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평범한 존재들이었으니까. 적자생존의 비정한 현실에서 단골로 밀려났던 존재감 없는 그들은 자기보다 더 우울한 누군가의 삶을 응원하며 대리전의 승리를 욕망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마침내 최후의 1인으로 남았을 때 벅찬 승리의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눈물로 호소하고 몸을 내던지는 누군가로부터 동질감을 느낀다. 이런 느낌은 감동으로 재생산된다. 그리고 현재의 우리가 어떤 결핍에 놓여있는지도 알려준다. 그것은 온전한 승리의 결핍, 온전한 자존의 결핍이다. 우리는 누군가 우리에게 씌운 프레임을 한번이라도 냅다 벗어던진 적이 있었을까. ‘나는 나다’라고 분명히 밝힌 적 있었을까. 오히려 스스로를 프레임 속에 집어넣으며 안심하진 않았는지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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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독립국이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제의 칼에 죽고 나자 고종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일단 죽지 않는 방법이 뭔지 궁리했다. 서바이벌의 시작이었다. 말하자면 누구에게 먹힐 것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희한한 상황에 몰린 것이다. 무늬만 다를 뿐 조선을 먹겠다는 목적은 일본과 같았던 러시아는 고종의 불안을 간파한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코너에 몰린 고종에게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제안을 한다. 물론 조선을 먹고 일본까지 먹겠다는 술책이었다. 다른 대안이 없던 고종은 경복궁에 계속 머물자니 황후처럼 일본의 칼을 맞을 수도 있어서 불안했다. 결국 궁을 버리고 야반도주하듯 세자와 러시아 공관으로 몸을 피한다. 이것이 1896년, 아관파천이다. 500년을 이어온 전통의 왕조가 살기 위해 스스로 궁을 폐하고 자국 안에서 망명을 한 것이다. 1년 넘게 공관에 숨어 지내던 고종은 왕조의 자존심을 원하는 민심에 밀려 1년 후 경운궁으로 복귀한다. 버리고 도망간 경복궁은 폐궁이 되어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경운궁의 주변은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서구 열강의 공사관이 밀집된 미묘한 장소였다. 고종은 외교적으로 민감한 장소를 골라 일본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안전망 역할을 경운궁이 해낼 걸로 기대했다. 경운궁은 원래 조선 초기 월산대군의 사택지였다. 당연히 도시의 공간적 위계상 궁궐이 들어갈 만한 장소가 되지 못했다. 풍수학적으로나 왕조의 정통성 측면으로나 마땅한 당위성이 없었다. 물리적으로도 궁을 지을만한 넉넉한 면적조차 확보하기 힘든 공간이었다. 하지만 고종은 이 장소를 ‘어떡하든’ 궁으로 변모시키려 했고, 이미 외세에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1897년 허울뿐인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일본을 피하기 위해 결국 마찬가지의 목적을 가진 다른 외세의 입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 넣은 것이다. 결국 1905년 러시아가 일본에 패하게 되고 조선은 전리품 신세가 되어 일본에게 합방 당하고 만다. 스스로 섬처럼 고립되고자 했던 경운궁은 멸망한 왕조의 마지막 궁으로 짧은 생을 끝내고 고종의 자택으로서 명맥을 유지했다. 덕수궁이라는 호칭은 고종이 권좌에서 물러난 후의 일이다. 뒷방 노인네처럼 홀로 남은 고종에게 일본이 마지막 예의를 표하며 천수를 다하라는 의미의 ‘덕수궁’이라는 별호로 칭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망한 나라의 왕에게 천수를 누리라는 것은 욕이나 마찬가지. 죽이지 않을 테니 잘 살라는 이야기다. 어떤 위협도 안 된다는 의미였다. 고종은 천수를 다하고 1919년까지 살다가 서거했다. 덕수궁은 기묘한 고립감을 자아낸다. 이런 미세한 느낌은 덕수궁에 얽힌 사연을 알기 전부터도 충분히 감지 할 수 있었다. 특별히 예민한 감각을 통해 살피지 않아도 느껴진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덕수궁 담 주변에 이웃한 그 당시 열강들의 흔적 때문이다. 담 너머 궁을 넘겨다보는 그들의 시선은 지금도 심사를 복잡하게 한다. 내 나라의 한복판에서 스스로를 유배시켜야 했던 왕조의 처연함을 느끼게 한다. 이국에 전파될 때 반드시 그 땅의 스타일에 맞추어 성전을 만든다는 성공회 건물의 종탑이 국적불명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음을 바라볼 때, 미 대사관 사저로 올라가는 길이 여전히 통행을 막고 그들의 영토로 존재함을 바라볼 때, 탑만 남은 러시아 공관이 궁의 용마루보다 훨씬 높은 언덕 위에서 궁의 안마당을 훤히 내려다보고 있음을 바라볼 때, 뜬금없이 그리스와 바로크 건축양식을 뒤섞어 백돌로 지어진 석조전의 이국적 전경을 옆의 중화전과 함께 바라볼 때 그렇다.덕수궁, 아니 경운궁이라는 장소는 죽지 않기 위해 스스로 유배지에 걸어 들어간 한 나라의 흔적을 담는다. 사방에 적이 깔린 상황에서 최악을 피하고 차악을 골라야 했던 서글픈 선택의 역사를 보여준다. 하지만 간절한 구원의 퍼포먼스에도 불구하고 서바이벌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것은 외세가 만든 프레임 속에 스스로를 가둔 탓이다. 종종 즐기는 덕수궁 산책은 늘 간절한 메아리를 불러온다. 그것은 ‘나는 독립국이다’라고 스스로의 자존감을 드러내고 싶었던 누군가의 말 못할 사연이다. 8월은 해방을 기념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스스로 포기한 자존감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힘없는 왕조의 국모가 외세의 칼에 쓰러진 기일이 8월 20일이다. 그 죽음에서 촉발된 왕조의 운명은 15년 후 1910년 8월 29일, 결국 종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