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y True to Herself
Bae, Haesun

배해선을 만난 곳은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연습실이 자리한 블루스퀘어였다. 12월 9일, 코앞으로 다가온 개막에 바쁜 그녀를 위해서였다. 이번 작품에서 그녀는 줄리엣의 유모 역을 맡았다. 배해선의 색을 더한 유모가 기다려지는 이유는 이제까지 보여준 그녀의 자취 때문이다. 

1995년 데뷔 후 뮤지컬 <시카고> <아이다> <모차르트!> 부터 연극 <나는 너다> <친정엄마> <그 여자 억척어멈> 등까지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무대에 오르면 저도 모르던 힘이 솟는다고 했다. 그녀는 스스로의 강점과 약점을 정확히 알고, 약점을 피하려들지 않는다. 언제나 진솔하게 자신을 맞닥뜨리고 성장하려는 그녀는 진짜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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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가 예정된 월요일 낮은 고요했다. 고요를 깨뜨린 건 배해선의 밝은 인사. 실력을 인정받는 정상급 배우에게 막연히 느끼던 긴장이 단숨에 풀어졌다. “기자님, 이 반지가 예뻐요? 아니면 이게 더 좋아요?” 사진이 잘 받을 것 같은 소품을 골라달라며 배해선이 손가락을 내밀었다. 다정하게 미소 짓는 그녀에게서 배려심이 느껴졌다. 그녀 덕에 인터뷰 시작이 웃음으로 가득찼다.

# A Classic
곧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막이 올라요. 준비로 바쁠 것 같은데, 요즘 어떻게 지냈어요? 
이제까진 드라마 촬영하고 다른 공연을 하느라 바빴어요. 지난주부터는 <로미오와 줄리엣> 연습에 집중하고 있어요. 아직 구체적으로 뭘 해보는 단계는 아니구요, 서로 많이 얘기하면서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는 단계예요. 이 작품이 워낙 많이 공연됐잖아요, 여기에다 어떻게 우리 팀의 색깔을 입힐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어요. 요즘은 자유롭게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죠.

이번 작품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개성이 뚜렷해요. 배우 간의 합은 어때요? 
색깔이 잘 맞아요. 물론 서로 갖고 있는 생각이 다르긴 하지만, 점점 맞춰가고 있어요. 특히 우리 배우들은 뭐랄까, 틀이 있는 연기가 아니라 굉장히 자연스러운 연기들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연기 톤이 잘 맞아서 좋아요.

양정웅 연출가와는 첫 만남이에요. 어떻게 함께하게 됐어요? 
원래는 모든 역할이 원캐스트였어요. 유모 역할도 원래 (서)이숙 선배님 혼자 맡으시는 거였는데, 선배님이 드라마 때문에 조금 바쁘셔서 저한테 제안을 주신 거죠. 유모역을 맡기엔 연기 관록이나 경험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망설였어요. 그런데 연출님이 기존 유모의 느낌과 다르게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셨대요. 좀 더 젊게 가고 싶다고 하셔서 하게 됐죠. 아직도 이게 잘한 선택인지는 모르겠어요. (웃음)

구체적으로 연출가가 생각한 유모 캐릭터는 어떤 걸까요? 
이 공연에는 원작에 있는 줄리엣 부모님 역할이 없어요. 그래서 유모에게 줄리엣의 엄마 이미지까지 있어야 하거든요. 누구보다 줄리엣을 아끼고 사랑하지만 야단쳐야 할 때는 엄중하게, 한 여자로서 인생선배로서 조언해주기도 해야 하고요. 어떻게 표현하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유모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진짜로 가져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연기를 시작하고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새로운 작품에 들어갈 때는 늘 약간의 부담감을 느끼기도 해요? 
모든 장르가 그렇겠지만 연극은 정말 라이브잖아요. 관객이 바로 앞에 있어요. 어떤 필터가 없죠. 자기 몫을 무대에서 오롯이 해내야 해요. 벌거벗은 기분도 들어요. 또 연극은 배우가 끌고 가는 힘이 굉장히 커요. 배우가 진심을 제대로 전해야지만 관객이 공감할 수 있어요. 여기서 오는 책임감이 있죠. 이 부분은 아마 30년, 아니 50년을 해도 어려울 것 같아요.

이번에도 역시 그런 부담을 느꼈을 것 같아요. 
어떤 작품은 연출님이 미리 특정한 형식을 정해두고 배우의 연기톤을 조절하기도 해요. 그렇게 배우가 형식적인 연기를 해야 하는 작품도 간혹 있죠. 그렇지만 보통은 어떤 인물을 완성해야 하잖아요. 단순히 하는 척만 하는 게 아니라요.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 부분에서 좀 어려워요. 평소에 자신 있던 스타일의 연기도 아닌데다, 유모라는 역은 무대 전체를 굉장히 유연하고 재미있게 만들어야 하는 역할이기도 해서 더 부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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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원작이 셰익스피어 작인 만큼 대사도 문어체로 표현돼 있어요. 문어체는 언뜻 바로 이해가 되지 않는 느낌이 들기도 해요. 관객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어떤 노력을 하고 있어요? 
이해가 어렵거나 말이 이상할 것 같은데, 신기하게도 지금 연습하는 걸 보고 있으면 전혀 그렇지 않아요. 완벽한 고어(古語)를 재현한 건 아니거든요. 물론 로미오와 줄리엣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나 고백하는 장면 같이 몇몇 장면에는 고어가 살아있어요. 하지만 또 어떤 부분에서는 쉽게 풀어져 있구요. 직접 공연을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여러 번역본을 두고 많이 연구하고 고민했어요.

여러 번역본을 다 읽고 있는 거예요? 
같은 한 장면을 정할 때도 모든 번역본을 다 읽어봐요. 원래 등장인물은 더 많은데 지금 8명으로 압축한 거잖아요. 그래서 다같이 어떤 챕터를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이런 연구를 많이 하죠. 재미있어요. 학생 때로 돌아간 기분이랄까요? <로미오와 줄리엣>은 정말 많이 읽은 작품인데도 미처 몰랐던 부분을 느끼고 있거든요. 새롭고 신선해요.

요즘엔 이 오래된 이야기를 비현실적인 사랑 이야기로만 생각하는 사람도 많아요. 이 시대에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작품이 갖는 의미가 뭐라고 생각해요? 
너무너무 재미있는 게요. 이게 그냥 사랑 이야기로 끝날 작품이 아니더라구요. 어느 시대나 대립과 갈등이 있어요. 이 작품 속에도 몬태규와 캐플릿 가(家)의 대립이 나오구요. 근데 그 안에서 두 젊은이가 사랑을 해요. 어떤 이해관계나 조건을 전혀 생각 않고 그냥 첫눈에 반해서 죽을 때까지 사랑을 하는 거야. 그 순수한 사랑이 거울이 돼서 너무 많은 걸 가지려고 하는 어른들의 욕심을 비춘다고 해야 할까요? 그 욕심 때문에 로미오의 집안은 대가 끊겨요. 외아들이 죽어버렸으니까. 모든 걸 가지려다가 오히려 모든 걸 잃게 된 거예요. 지금도 사람들의 욕심, 거기서 오는 대립은 끝이 없잖아요. 이 작품을 보면 한번쯤 다시 생각하게 될 것 같아요.

이 이야기에서 현시대를 비춰볼 수도 있는 거군요. 
또 있어요. 이 작품에서 가장 의미 있는 건 바로 ‘용기’예요, 모든 걸 뛰어넘을 수 있는 용기.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랑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게 돼요. 용기를 가진 사람은 정말 바라는 걸 얻게 된다는 거죠. 그 용기 덕분에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원한 관계가 끝나고, 베로나에 평화가 찾아온다는 것도 의미심장해요. 가끔 어른이 된다는 건 너무 많은 걸 붙잡고 안 놓으려고 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이 작품을 하면서 정말 바라는 걸 선택하는 용기, 욕심을 버리는 용기…. 순수한 원점을 떠올리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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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Genuine Actor
1995년 연극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데뷔했어요. 배우 인생은 어떻게 시작했는지 더 자세히 듣고 싶어요. 
김효경이라는 은사님이 계세요. 대학 새내기 때는 소심해서 사람들 앞에 서는 게 힘들었어요. 근데 이상하게 그 교수님께서 저를 자꾸 사람들 앞에 나서게 하시는 거예요. 대극장 로비에서 노래를 부르게 시킨다거나, 화술 수업 때 글 읽는 걸 시키시거나. 처음엔 정말 원망했어요. 저 사람 나한테 왜 저럴까 싶었죠. 지금 생각하면, 대학 입학시험 날, 노래를 불렀는데 그때부터 좋게 봐주셨던 것 같아요. 교수님이 당시 연극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연출을 하게 되셨어요. 스칼렛 오하라 역은 박상아씨가 맡았구요. 근데 교수님께서 그 역할의 언더스터디를 저한테 맡으라고 하시더라구요. 대학교 2학년이던 저를요. 그게 제 첫 외부 작품이에요. 교수님은 절 뮤지컬 배우로 키우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제가 연극판으로 들어가버렸어요.

무슨 이유가 있었나요? 
교수님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하면서 너무 힘들었어요. 그 안에 배우가 100명인데 눈총을 얼마나 받았겠어요. 계속 교수님과 함께하면 내 실력과는 상관없이 교수님 덕에 저렇게 잘되는구나 소리를 들을 것 같았어요. 100명 중에 98명이 뮤지컬을 하고 싶어할 때였는데 전 연극을 선택했어요. 유인촌 선생님 밑에서 연극 했죠. 뮤지컬은 뒤늦게 하게 됐구요.

뮤지컬 데뷔는 학전의 그린에서 했죠? 학전 20주년 기념 공연에도 참여했구요. 학전이 배우님에게 엄청난 의미를 가지는 곳이겠구나 싶었어요. 
김민기라는 사람 자체가 준 메시지가 굉장히 커요. 정말 꾸밈이 없어요. 너무 옹고집. (웃음) 정말 지독하리만큼 사람에 대해 집요하게 표현하는 분이에요. 인간이 무엇인가? 사람이 무엇인가? 많이 고민하게 만들어주셨어요.

학전을 ‘엄마 뱃속과도 같은 곳’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어요. 
그런 표현을 왜 했냐면, 배우가 나름대로 ‘연기란 이런 게 아닐까?’, ‘누군가를 표현하는 건 이런 게 아닐까?’라고 생각을 하잖아요. 근데 학전에 가서 김민기 선생님이랑 작업을 하면 그 생각이 다 없어져요. 없어져야 돼. 엄마 뱃속에 있는 그 상태, 아무 것도 없는 그 상태로 다 벗겨지는 거야. 지금까지 살아온 걸 고민하게 되고 의심하게 돼요. 그러면서 진짜 살아있는 게 뭔지, 그 안에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게 뭔지, 본질을 고민하게 되죠.

김민기 선생님은 기본을 엄청 중요하게 여기시는 걸로도 유명하시죠? 
선생님은 뮤지컬을 하는데 노래를 안 가르쳐주시고 음가에 맞는 우리말 먼저 시작하세요. 걸음마하는 것처럼요. 그 작업을 굉~장히 오래하세요. 그분께 처음 들은 말이 ‘노래를 말하듯이, 말을 노래하듯이’예요. 그냥 막 기교만 부리고 노래만 잘하고 이런 걸 싫어하세요. 우리말답게 노래하는 걸 좋아하시고요. 기본에 대해 고민하는 걸 강조하셨죠. 어떤 인물을 표현할 때도 그걸 가장 고민하게 해주셨기 때문에, 지금 대한민국을 빛내는 배우들 거진 김민기 선생님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거예요.

얼마 전에 <그 여자 억척어멈>이라는 작품으로 ‘원로연극제’에 참여했어요. 연극계의 산 증인인 김정옥 연출가와의 작업은 어땠어요? 
원래는 그게 박정자 선생님께서 1997년에 하신 작품인데요. 연출님께서 이번에도 박 선생님께 같이 하자고 하셨나 봐요. 근데 박 선생님께서 당신은 이제 그 작품을 하긴 너무 힘들다고 하셨대요. 그러면 할 만한 좋은 후배를 소개해 달라 하셨는데, 그게 제가 된 거죠.

1인 4역을 해내야 하는 모노드라마예요. 정말 어려운 작품인 만큼 결정하기까지 고민 많이 했을 것 같아요. 
처음에 전 도저히 이 작품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안 된다고 말씀 드렸어요. 이 작품은 박 선생님도 오십이 넘어서 하신 작품이거든요. 그거 하기에 전 연륜도 깜냥도 안 됐어요. 그런데 연출 선생님께서 “이 작품을 조금 젊게 갖고 가자, 배해선이 모놀로그를 지금 경험해보는 것도 정말 큰 경험이 될 거다” 하셔서 억지로 하게 됐어요.

예상만큼 정말로 힘들었죠? 
정~말 고생했어요. 너무 고생했어요. 왜냐하면 일단 너무 외로워요. 누군가와 상의할 수도 없고, 내 연기를 봐줄 사람도 없어요. 게다가 노래가 있는 극이었기 때문에 선곡, 편곡, 가사…. 하나하나 다 생각해야 했거든요. 모든 장면을 어떻게 할지 스스로 다 계산해야 했으니까요. 와, 정말 의지할 곳 하나 없이 한다는 게 너무 외롭더라구요. 또 워낙 옛날 작품이라 연출 선생님과 대화하면서 약간의 수정까지 해야 했어요. 이것저것 다 해내야 하는 과정이 너무 어려웠어요.

하지만 그 모든 걸 잘 해냈어요. 
하나의 큰 산을 넘은 작품이에요. 젊은 연극에 가려서 전통적인 좋은 작품들이 무대에 오르기 점점 어려워지고 있거든요. 우리나라 연극계의 역사를 증언하시는 선생님의 작품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다는 것도 정말 소중한 일이죠.

연극, 뮤지컬, 음악극…. 장르에 상관없이 무대에 오르고 있어요. 작품을 고를 때는 어떤 기준을 갖고 결정하는 편이에요? 
그냥 하고 싶은 작품? (웃음) 어떤 흐름의 기(氣)랄까, 그게 맞는 작품이 있어요. 제 선택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아요. 상을 받은 다음 배해선이 이제 뭘 할까 관심이 쏠렸을 때도 정말 조그만 극장에서 하는 연극을 선택했거든요. 내가 너무 부족하니까 그 부분을 단련할 수 있는 작품을 선택하게 되는 것 같아요. 물론 주특기를 펼칠 수 있는 작품을 할 필요도 있어요. 자신감을 얻고 싶을 때나 신명 나게 일하고 싶을 때는요. 근데 보통은 스스로에게 시험공부를 잔뜩 주는 거죠.

<그 여자 억척어멈>도 그 시험공부 중 하나였을까요? 
그 작품도 아무리 잘해봐야 완벽히 해낼 수 없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 근데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배해선이 이미 잘하는 장기를 부려서 얄팍하게 소화해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거죠. 좀 어렵고 욕먹고 하더라도 자신 없던 부분을 깊이 있게 파는 거, 그 부분을 진솔하게 맞닥뜨리는 거,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마음이 지금의 배해선을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 다양한 역할을 맡았잖아요. 그 수많은 인물의 삶을 받아들이고 체화하는 방식이 있어요? 
예전엔 그냥 그 인물로 살려고 했어요. 학전의 <의형제>같은 작품은 연습까지 합쳐서 1년 넘게 했거든요? 그 동안 정말 그 역할, 아줌마의 삶을 살았어요. 근데 이제는 완벽하게 그 인물이 되려고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렸을 때는 감이 하나도 안 잡혔으니까 그랬던 거구요. 이제는 책이나 영화, 만화책이나 그림도 보구요. 인물 자체에 대해 연구하기보다 더 포괄적인 이미지를 얻으려고 해요. 정말 안 풀릴 때는 길거리에 하루 종일 앉아서 사람들만 구경해요. 그들의 인생과 스토리를 상상하면서 이미지를 만들어 나가는 거죠.

무대 위에만 쭉 서다가 2015년 <용팔이>로 첫 드라마 출연을 했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어요? 
예전에도 영화나 드라마 제안은 많았는데, 제가 여러 가지를 한번에 잘하지 못해요. 그리고 무대 예술이 주는 어떤 독성? 그 중독성이 너무 강해서 그걸 벗어나서 다른 걸 하고 싶다는 생각이 미처 들지 않더라구요. 2~3년 스케줄도 미리 다 짜인 상태였고요. 그러다 메르스 때문에 공연이 다 미뤄지면서 짬이 생겼어요. 딱 그때 <용팔이> 제안이 들어온 거죠. 언젠가 드라마를 할 거라면 더 나이 들기 전에 해보자, 나중에 생판 처음부터 배우는 거보다 좋겠다, 재미있겠다 해서 하게 됐어요.

드라마 촬영은 어떤 경험이었어요? 
드라마에선 낯선 얼굴이니까 다 절 신인으로 알더라구요. 그냥 초짜라고 생각하셔서 면박도 주고 막 대하는데 그게 너무 좋았어요. 처음으로 돌아가서 하나하나 배우는 느낌? 물론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새로운 에너지가 생겼어요. 아, 정말 놀랐던 건 작업환경이 너무 어렵더라구요. 이제까지 스스로 혹독하게 일해왔다고 생각했는데 거긴 환경 자체가 다른 거야. 이렇게 고생하면서 드라마를 한 편 한 편 완성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작년 한 해만 해도 드라마와 함께 6편 이상의 작품을 했어요. 에너지 소모가 엄청날 것 같은데 어떻게 재충전을 하나요? 
먹는 걸로 풀어요. (웃음) 작품을 하면 너~무 힘든데, 신기하게 연기에 에너지를 쏟으면서 충전을 해요. 이제까지 여유롭게 살아본 적이 없어요. 어떤 해에는 하루도 쉰 날이 없었을 정도예요. 그러다 보니 의도적으로 긍정적인 기운을 스스로에게 주입시켜요. 어차피 해야 하는 거고 이겨야 하는 거라면, 좋은 맘을 갖고 어떻게든 뚫고 나가자고 마인드 셋을 해둬요.

정말 일을 사랑하는 것 같아요. 그런 맘을 먹을 수 있다는 자체가 놀라워요. 
진짜 너~무 힘들어요. 너무너무 힘든데요, 진짜 재미있어요. 항상 행복하고 좋은 건 아니죠. 매번 새로 태어나야 하니까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요. 관객들한테 거짓말하지 않으려면 자신을 박박 긁어가지고 상처 나게 해야 할 때도 있고. 근데 뭐랄까, 무대에 서면 관객한테서 치유 받는 느낌이에요. 무대 오르기 전엔 힘들어서 몸도 못 가누겠어요. 근데 관객을 만나면, 마약에 취해서 하고 있는 느낌이 들어요. 나도 모르던 기운이 솟으면서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예전과 비교해서 연극, 뮤지컬계가 달라지고 있는 점은 뭐라고 생각해요? 
옛날보다 좀 더 독립적으로 변한 것 같아요. 자신의 일만 잘하면 되니까 합리적인 면이 생긴 건 좋아요. 그런데 좀…. 뭐랄까, 유대감 같은 건 줄어들었어요. 근데 그게 무대에서 티가 나거든요. 옛날엔 작품 시작하기 전에 배우들끼리 다 친해지는 게 먼저였어요. 예를 들어 때리는 연기를 해야 돼, 패야 돼. 그럼 정말 자주 보고 친해서 믿음이 생겨야 맘껏 연기할 수 있어요. 무대 위에 올라가면 다 티 나. 얘랑 얘는 안 친하구나, 쟤는 앙상블이랑 연습 안 했구나. 무대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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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er Journey To Tomorrow
드라마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는 “더 빨리 할 걸 그랬다”고 지나가듯 말했다. 그 이유를 물으니 아버지 때문이라고 했다. 배해선의 아버지는 딸이 배우를 하는 걸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달갑지 않아 했고, 무수한 그녀의 작품 중에서도 단 한 편만 실제로 보셨다고 했다. “근데 알고 보니까 시상식도 다 챙겨보셨더라구요. TV 드라마에 딸이 나오는 걸 보셨으면 얼마나 더 좋아하셨을까 싶어서요.” 인터뷰 내내 정돈되어 있던 그녀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떨렸고, 눈에는 살짝 눈물이 고였다.

아버지가 보셨다는 한 편의 작품이 뭐였어요? 
그게 하필 <시카고>였어요. <시카고>, 정말 근사하고 좋은 작품이에요. 그런데 아버지 눈으로 보면 일단 노출도 많고 살인 이야기도 나오니까, 혹시 언짢으셨을까 걱정이 돼요. 아직도 제 맘에 한으로 남아요. 근데요, 부모 마음이라는 게 그런 건가 봐요. 나중에 들어보니까 속으로는 되게 자랑스러워하시고, 내 딸이 쟤다 하시면서 기특해하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 살아계셨을 때 여기저기 얼굴을 많이 비췄으면 얼마나 큰 기쁨을 드릴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에….

지금까지 모습으로도 충분히 자랑스러워하실 거예요. 
물론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요. 자꾸 맺힌 것만 남아요. 못 해드린 거, 잘못한 것만 계속 떠올라요. (웃음)

언제부터 배우를 꿈꿨어요? 
엄마가 그러는데, 아기일 때도 끼가 넘쳤대요. 밥상 위든 담벼락 위든 남들보다 높은 곳에 올라가야지만 노래했대요. 아무도 안 듣는데 혼자 그렇게 노래 연습을 했다고 하더라구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만능 엔터테이너의 꿈을 꿨던 거 같아요. 배우도, 가수도, 아나운서도 다 하고 싶었거든요.

다 잘해내고 있지만, 특히 연극에 비중을 두고 있죠? 
드라마성이 강한 작품을 선호해요. 뮤지컬은 춤이나 노래의 비중이 크잖아요. 춤추고 노래하는 것도 좋지만 개인적으론 인간에 대해 더 고민하고, 치열하게 텍스트 자체에 집중하는 게 더 잘 맞는 것 같아요. 인생에 대해 공부하는 느낌이랄까요?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어요? 
영원히 기억되는 건 원하지 않아요. 삼십 대 초반 정도까지는 기억되고 싶었어요. 근데 지나고 보니 사람들이 잊어버리는 건 순간이더라고, 안 보이면 바로 잊어요. 그래서 그냥 좋은 배우 되고 싶어요. 좋은 사람이 반드시 좋은 연기를 하는 건 아니에요. 근데 좋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연기는 분명히 있어요. 어릴 때부터 아빠가 자주 하셨던 말씀이 “인간이 돼라. 인간 안 되었는데 성공해봤자 답이 없다”고 하셨어요. 그땐 이해를 못 했는데, 이젠 알겠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해. 특히 배우는 진심을 표현하려면 정말 그래야 하는 것 같아요. 스스로 좋은 배우라 생각하면, 이제 사람들이 기억 못 해줘도 괜찮을 것 같아.

정말 열심히 해본 사람만 할 수 있는 말인 것 같아요. 
정말 원 없이 열심히 했어요. 아직도 많이 모자라긴 하지만요. 남들 1년 살 때 난 5년치를 살았어. 그렇게 치열하게 했어요. 뭔가 열심히 했으면 그거 왜 했니? 왜 이렇게 못하니? 욕 먹어도 괜찮아요. 그렇게까지 대단할 필요 없어요. 그냥 그 순간에 존재했으면 됐어요. 못하면 못한 대로 또 다 지나가요. 사람들은 잊어요. 제가 정~말 잘한 것도 사람들은 다 잊어 먹더라구요. 하하하하. 그래서 알게 된 거야.

# Just One Brick
배해선이라는 배우는 열정적인 프로면서도 욕심에 점철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토록 열심히 하는데 어떻게 집착하지 않을 수 있냐고 물었다. 죽는 날까지 딱 벽돌 하나만 쌓으려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예전에는 매번 집을 짓고 싶어서 고통스러웠어요. 이제는 벽돌 하나만 만들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그 벽돌이 뭉그러진 모습이면 안 돼요. 정말 쌓고 싶은 벽돌이 뭔지 생각하고 그 모양, 색깔, 질감으로만 완성하면 돼” 그녀는 집을 짓고 싶어 이 악물었던 시간을 거쳤기에, 비로소 저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을 거다. 자신은 영원히 배우로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배해선이 말했다. 평생에 걸쳐 만들어갈 그녀만의 벽돌을 지켜보는 일은 관객의 몫이다.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2016년 12월 9일~2017년 1월 15일 /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주최_SEM Company / Interpark.com